사회 사회일반

숭례문의 과거·현재·미래…

포격… 火魔… 복원… 수난 겪고 내년 12월 다시 태어나 국민품으로



1392년 개국한 조선은 태조 3년(1394)에 서울로 천도를 결정하고 태조 5년부터 도성 축조를 시작했다. 서울 도성의 4대문 가운데 남쪽 대문을 일컬어 숭례문이라 했다. 당시 북쪽에는 숙정문, 동쪽에 흥인지문, 서쪽에는 돈의문이 있었다. 이후 숭례문은 몇 차례 수리 과정을 거쳤다. 세종 29년(1447)에 시작돼 이듬해 3월에 완료된 공사는 지대를 높이기까지 한 대형 보수공사였다. 두 번째 수리는 성종 9년(1478)에 논의가 있은 뒤 이듬해 4월에 상량(上樑)을 거행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이 전한다. 조선 말기 국권이 쇠락하자 도성 정문의 기능도 크게 위축된다. 1898년 12월에는 홍예(虹霓ㆍ아치형 통로) 중앙을 관통하는 전차가 개통됐다. 이후 1907~1909년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면서 주변에 석축을 쌓았고 이때부터 도로 중앙에 고립된 현재 상태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는 수난의 역사였다. 홍예를 통과하던 전차선로는 외부로 이전된 대신 일제의 주요행사 때마다 장식 조명과 현수막이 걸리는 설치 보조 격으로 전락했다. 1932년부터는 숭례문 중앙으로의 출입이 금지되면서 숭례문은 도심 속 섬처럼 대중의 삶과 유리된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의 포격으로 크게 훼손돼 긴급공사가 진행됐고 1961년부터 문루의 완전 해체와 육측 일부에 대한 해체공사가 진행됐다. 대한민국의 근대화, 서울의 국제도시화에 발맞춘 숭례문의 보수공사 후 공원조성 사업을 거쳐 2006년 3월에 숭례문 일부가 개방됐다. 2008년 2월 방화로 숭례문이 소실됐다. 복구에는 국고 예산 250억원이 투입된다. 여기에다 국민성금 5,000만원과 국민신탁이 보유한 7억원 이상의 기금이 쓰일 예정이다. 소나무 기증에 국민 150명이 참여의사를 전했고 이중 11명의 나무가 실제로 쓰인다. 공사에는 대목장, 석장, 단청장, 제와장 등 중요무형문화재 6명이 우두머리인 편수로 참여한다. 숭례문은 조선 초기의 궁 관련 건축 중 유일하게 남아있어 국보 1호로 지정됐다. 복구된 숭례문은 2012년 12월에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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