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인덕원 이야기


고향에서 추석연휴를 마치고 밤늦게 군포사거리로 접어들었다. 저 멀리 인덕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연무로 밤하늘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어느덧 인덕원에서 둥지를 튼 지가 25년이 돼간다. 제2의 고향이다. 인덕원은 조선 초기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알려졌는데 동쪽으로는 의왕시, 서쪽으로는 안양시, 남쪽으로는 군포시, 북쪽으로는 과천시로 연결된다. 인덕원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환관들이 한양에서 내려와 살면서 주민들에게 어진 덕을 베풀었다 해서 인덕이라는 말에, 마침 이곳에 관리들의 숙식처였던 원이 있어 인덕원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웃한 과천에 정부 제2청사가 들어선 것은 인덕원이라는 지명과 연이 닿아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는 1597년 5월 초사흘에 인덕원에서 쉬어갔다는 내용이 있다. 또 조선 정조대왕은 부친 사도세자의 능 참배 시 여섯 차례에 걸쳐 지나갔다는 원행정례의 기록이 있어 인덕원은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광복 직후까지만 해도 불과 30여 호에 지나지 않던 이곳이 여러 차례의 도시계획 등으로 과천 이남 지역에서는 가장 번화한 지금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에 이사 올 때만 하더라도 왕복 4차선에 불과하던 곳이 왕복 10차선으로 확장됐고 5층 건물이 가장 높았는데 20층 이상의 건물이 즐비하다. 지하철이 들어섰고 1990년대 이후 개발 붐과 함께 주변 지역도 아파트 숲으로 바뀌었으며 폭우로 범람하던 학의천도 어느새 정비돼 조깅코스와 체육공원이 조성됐다. 도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상점가가 형성됐으며 이면도로에 있는 많은 가게들과 함께 밤이 되면 불야성을 이룬다. 음식점ㆍ호프집ㆍ노래방ㆍ제과점ㆍ꽃집ㆍ미장원 등등 많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경제위기 때는 인덕원의 경기도 풀이 죽었고 2002년 월드컵 때에는 온 동네에 환호와 붉은 물결이 출렁거렸다. 최근에는 외국인도 많이 눈에 띄어 우리나라의 국제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고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실감하기도 한다. 신장 개업한 가게는 돈 많이 벌고 일자리도 많이 만들기를 기원하고 폐업한 가게를 보면 남몰래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있는 이곳 인덕원. 왁자지껄한 손님이 많은 가게를 보면 우리 집 가게처럼 기쁘고 손님이 없는 가게 앞을 지나가면 왠지 기분이 가라앉는다. 내 아내도 어느새 소상공인 편이 돼 동네 슈퍼가게의 단골이 됐고 가족과 외식할 때면 자식들이 먼저 손님이 적은 집을 고른다. 20ㆍ21세기 양 세기를 걸치면서 우리 경제의 발전과 변화상을 인덕원에서 그대로 보고 느끼면서 나는 살고 있다. 추석연휴가 아직 안 끝나서인지 가게 문들이 많이 닫혀 있다. 이 밤이 지나면 활기찬 인덕원의 성장 엔진이 다시 힘차게 돌아갈 것이다. 역사의 고장이며 한국 경제의 바로미터가 되고 있는 인덕원이 영원히 발전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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