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중국 개혁 개방 30년] 국민소득 무려 55배 '폭발적 성장'

덩샤오핑 1978년 "4대 현대화" 과감한 도전<br>姓資姓社논란·톈안먼 사태등 위기 극복하고<br>막강한 경제·외교력 보유 "美와 어깨 나란히"




[중국 개혁 개방 30년] 국민소득 무려 55배 '폭발적 성장' 덩샤오핑 1978년 "4대 현대화" 과감한 도전姓資姓社논란·톈안먼 사태등 위기 극복하고막강한 경제·외교력 보유 "美와 어깨 나란히" 베이징 문성진 특파원 hnsj@sed.co.kr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ImageView('','GisaImgNum_2','default','260'); ImageView('','GisaImgNum_3','default','260'); “우선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적으로 행동하자. 생각을 해방하기만 하면 과거의 부정적 문제와 새로 출현한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1978년 당시 중국의 권력 실세 덩샤오핑(鄧小平)은 ‘흑묘백묘(黑猫白猫)’의 이론(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을 모토로 과감한 개혁개방 드라이브를 걸면서 이같이 강조했다. 그로부터 꼭 30년이 지난 2008년, 오늘의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슈퍼파워’가 됐다. 중국경제는 그 동안 실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개혁개방을 시작한 1978년 379위안에 불과하던 1인당 GDP는 2006년 1만6,084위안로 약 42배 증가했고, 올해 말까지 2만1,000위안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된다. 30년간 중국인들의 명목 1인당 GDP는 무려 55배나 증가한 것이다. 또 외환보유액은 올해 6월말 현대 1조8,088억달러로 압도적으로 세계 1위국 지위를 굳혔으며, 대외무역부문에서도 올해 독일을 제치고 세계 최대 수출국에 오를 것이 확실하다. 그 동안 중국인들의 생활상은 크게 달려졌다. 개혁개방 당시 자전거와 손목시계, 선풍기, 재봉틀 등이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자동차와 고급 아파트, 해외여행상품을 향유하는 시대가 됐다. 중국 국가통계국이 발행하는 ‘인민생활지’에 따르면 개혁개방 이듬해인 1979년 베이징 주민의 연간 외식비용은 10위안 남짓했으나 2006년에는 1,320위안으로 130배 늘었다. 1978년 베이징의 1인당 의류비는 50위안이었으나, 2006년에는 1,442위안으로 급증했으며, 100가구당 컬러TV 보유대수는 1981년 1.7대에서 2006년 155.3대로 늘어났다. 외교 분야에서도 중국의 힘은 막강해졌다. 중국은 작년 12월 미 항공모함 키티호크호의 홍콩 입항을 거부하며 미국에 당당하게 맞서는가 하면, 달라이 라마를 접견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보복성 압박을 가해 독일내에서 메르켈 총리에 대한 비판론이 일 정도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또한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던 일본과 인도와 관계회복에 적극 나서는 한편, 북핵 6자 회담 의장국으로서 역할을 확대하고, 이란 핵과 미얀마 사태, 수단 다르푸르 사태 등 국제적 현안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 30년은 거대한 ‘성장의 파노라마’였다. 하지만 급격한 개혁에 대한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개혁 후유증으로 인한 시련도 있었다. 1976년 마오쩌둥(毛澤東) 사망 후 지도자로 재등장한 덩샤오핑은 1978년 제11기 3중전회에서 낙후된 중국의 공업, 농업, 국방, 기술 등 4개 분야를 발전시킨다는 ‘4개 현대화’ 달성을 위해 개혁개방의 기치를 내걸고, 개혁개방을 총지휘했다. 이후 개혁개방은 탄력을 받아 1982년에는 제12차 전국대표대회(전대)에서 ‘계획경제를 위주로 시장경제를 보조수단으로 한다’는 입장이 채택됐고, 1987년엔 13전대를 통해 계획과 시장이 내재적으로 통일된 체제라는 입장이 정리됐다. 그러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중국경제에 자본주의적인 요소가 늘어나면서 1980년대 후반에는 심각한 침체기를 겪는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인 ‘성사성자(姓社姓資)’ 논란이 가열됐으며 이 와중에 1989년의 텐안문(天安門)사태가 터져 개혁개방은 좌초될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작은 거인’ 덩샤오핑은 특유의 승부수를 던져 꺼져가던 개혁개방의 불씨를 살려냈다. 1992년 1월18일부터 2월21일까지 남부 지방을 시찰하면서 일련의 담화를 통해 개혁개방의 중요성을 역설한 ‘남순강화(南巡講話)’에 나선 것이다. 그는 남순강화에서 개혁개방의 가속화를 역설하고 계획경제든, 시장경제든 경제발전에 유리하면 된다고 강조하고, 일부 지역이 먼저 부유해질 수 있다는 선부론(善富論)을 제창했다. 이후 덩샤오핑을 계승한 장쩌민(江澤民)은 전임자가 닦아놓은 개혁개방을 토대로 중국경제를 든든한 반석에 올려놓았다. 또한 장쩌민이 제창한 3개대표론을 통해 자본가들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하는 파격적인 조치가 취해지고, 2004년 3월 제10기 전인대 2차 전체회의에서 사유재산권 보호조항이 헌법에 삽입됨으로써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법적 기반이 마련됐다. 후진타오(胡錦濤) 현 주석 집권 이후 중국은 개혁개방의 속도를 더욱 높였으며, 지난해 10월부터 사유재산권을 국유재산과 똑같이 보장하는 물권법(物權法)이 시행돼 사유재산을 보장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됐다. 또한 과학적 발전관에 바탕을 둔 조화사회의 구현을 통해 성장 못지 않게 분배를 중시하는 정책을 펴 나갈 방침이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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