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光植(언론인)삼국지에 전위라는 인물이 나온다. 조조의 친위대장인 전위는 기습공격에서 스스로 화살받이가 되어 주군의 목숨을 구한다. 아마도 김대중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장관들 스스로 악역을 맡을 각오를 하라고 일갈한 것은 이런 설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말씀이야 온갖 비난이 쏟아지더라도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할 말은 하고 소신 있게 대처하라는 것이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언행이 빌미가 되어 장관의자가 하루아침에 날라가는 판국에 감히 십자포화의 과녁을 자처하고 나서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장관의 말에도 언론자유는 보장되는 것이 헌법정신이겠지만 권력의 계율에는 책임을 더 강하게 묻도록 되어 있다. 소심껏 한 말도 사회적 동티가 되면 속죄양이 되는 예를 지난날에도 보고 현재도 보고 있다.
국정을 소상히 알리고 국민을 설득하려면 논리 정연하게 말을 잘 해야 하겠지만 그건 필요조건이고 투명성과 공개성이 충분조건이다. 워낙 허위와 왜곡이 판을 쳐 왔기 때문에 나쁜 내용이라도 진실을 말하면 면죄부를 줄 수도 있다는 게 이른바 국민정서처럼 되어 있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솔직성은 갈등을 넘어서게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솔직함을 결단하기까지는 인격과 자존심을 걸어야 하는 부담이 있다. 권위가 상실되고 패배감을 감수해야 한다. 장관의 경우 잘못된 정책이나 처신 혹은 실수를 솔직히 시인하고 나설 때 인간적인 면은 몰라도 자질론에서는 심각한 상처를 받게 될 건 뻔한 이치다. 그렇지 않아도 세론과 언론은 하이에나 같은 면이 있는 시대이고 보면 상처의 깊이는 치명상으로 돌아 올 가능성을 높인다. 악역은 좋은데 악인의 이미지를 남기고 그로 인해 권부의 호적에서 영영 파적을 당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차라리 소리없이 물러나고 다음 자리를 보장받는 게 현명한 처신이라 치부할 듯 하다.
공직기강을 세우겠다고 ‘10계명’을 선포했다. 장관급에게는 여기에 더하여 적극적 국정전파와 악역불사를 덧붙였다. 장관실만 지키지 말라는 제11계명이다. 하지만 권력의 본질은 최후까지 혼자서 살아남는 것이라고 한다. 이 학설을 뒤집는 예증을 보이기까지는 아직도 여러 조건과 수준이 성숙되지 않은 게 우리의 현실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