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80년대이후 대형금융사건 특징·결말

◎「주연」 못 밝힌채 용두사미식 종결/관련 은행장 처벌수준에서 거의 완결/부채규모 사건진행따라 “눈덩이” 양상80년대이래 국가경제를 뿌리채 뒤흔든 대형 금융사고나 대형부도는 대부분 기업과 금융권의 은밀한 뒷거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물론 뒷거래에 따른 대가가 오갔고 관련자들은 사법처리대상으로 전락했다. 또 금융권 외곽에서 이같은 금융사고를 부추긴 것으로 알려진 보이지 않는 세력은 대부분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처벌대상은 기껏해야 은행장에서 멈추었다는 공통점도 발견된다. 많은 기업들이 부도후 법정관리신청, 또는 법정관리 신청후 부도의 과정을 거쳐 제3자 인수가 추진됐으나 그마저 여의치 않은 기업은 공중분해되는 아픔을 겪었다. 또 사건발생초기 나왔던 부채규모는 사건이 진행되면서 몇배로 늘어나기도 했다. 한보부도의 경우도 현재 금융부채가 5조원 남짓인 것으로 나오고 있지만 결국 사채등을 더한다면 7조∼8조원선은 넘을 것이라는 추론이 나오고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고규모의 확산 80년대 최대의 금융사고는 역시 지난 82년 5월 터진 이철희·장영자사건으로 기록된다. 이·장씨 등은 81년 2월부터 1년여간 공영토건, 일신제강 등으로부터 편법적으로 받아낸 어음 7천1백11억원어치 가운데 6천4백4억원 어치를 불법유통시켜 금융시장을 마비상태로 몰고갔다. 불법유통 어음규모는 사건 발생초기 2천6백억원대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경제를 멍들게 했다. 90년대 들어 발생한 덕산그룹 부도 역시 최초 예측을 훨씬 웃도는 대형 금융사고로 기록됐다. 94년 2월말 부도초기 5천억원 규모로 추정되던 덕산의 부채규모는 2금융권과 사채시장의 부채규모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얼마 지나지않아 1조원대를 훌쩍 넘어섰다. 실체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지방기업의 부도금액은 부도후 보름만에 2천8백35억원대로 불어났다. 현재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한보는 지난 91년 수서택지특혜분양 사건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회생한 경험이 있다. 당시 한보그룹의 부채규모는 7천억원가량. 은행권에만 3천8백46억원, 투금에 1천1백78억원, 보험권에 9백74억원, 회사채 8백70억원등이 부채로 기록됐다. 그러나 지금과 마찬가지로 한보가 끌어다 쓴 사채규모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막연히 「엄청난 규모」로 추정됐을 뿐이다. 금융권은 그 후유증을 지금 앓고있다. ◇사고처리 절차 대형금융사고의 당사자인 기업들은 대부분 부도와 법정관리신청을 통해 제3자 인수의 길을 걸었다. 94년 3월 법정관리를 신청한 직후 채권은행들의 자금지원중단으로 곧 부도처리된 유원건설은 불과 2개월여만에 한보로 인수됐다. 우성건설은 96년 1월 거꾸로 부도후 법정관리 신청의 길을 걸었다. 재계랭킹 27위 기업답게 부도후 4일만에 누적된 부도금액만 2천3백52억원에 달했으며 그해 5월 한일그룹이 인수를 결정했다. 인수조건은 기존 부채에 대해 연8·75%의 우대금리를 적용하고 정상화자금으로 3년여간 2천7백56억원을 투자하는 것. 우성건설의 부실여신규모는 1조2천5백5억원에 달했다. ◇책임소재 금융사고는 대부분 금융기관의 암묵적, 혹은 적극적 협조를 동반했다. 이·장사건의 경우 당시 임재수 조흥은행장과 공덕종 상업은행장이 수뢰혐의로 법의 심판을 받았고 영동개발진흥 어음사기사건(83년9월)과 관련 이헌승 조흥은행장이 역시 수뢰혐의로 구속, 실형을 선고받았다. 덕산그룹 부도는 이형구 산업은행총재와 봉종현 장기신용은행장의 구속을 몰고왔다. 모두 대출의 대가로 뇌물을 받았다는 죄목이었다. 대부분의 금융사고나 대형부도가 무리한 금융권의 지원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 사건발생후 최고책임자인 은행장들의 사법처리는 불가피했던 것. 그러나 대부분 대형부도나 금융사고의 원인을 금융권 자체의 문제로만 국한한 관행은 여전했다. 이·장사건 당시 수사의 범위는 이미 사건개입의 전모가 드러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씨에 국한됐을 뿐 「더 큰 손」이나 정치권의 개입은 파헤쳐지지 않았다. 또 부도나 금융사고로 쓰러진 기업들 대부분이 정치권과의 유착설에 휘말렸지만 사후처리과정에서 설이 사실로 밝혀진 예는 찾을 수 없다. 로비에 관한한 상당한 실력을 인정받았던 한양의 배종렬 회장이 그랬고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자금동원력을 과시했던 덕산의 정애리시씨도 수사과정에서 「배후」를 드러내지 않았다. 대부분의 금융사고나 대형부도가 무리한 금융권의 지원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사건발생후 금융지원의 최고책임자인 은행장들의 사법처리는 불가피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금융이 자율적이지 못했던 시대에 은행장등 금융권 책임자들만의 힘으로 과연 특정기업에 대한 수천억원대의 자금지원이 가능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손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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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동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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