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신년 인터뷰] 박관용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이사장

정치인은 역사라는 법정의 영원한 피고인… 책임감 느껴야



대화 부족한 정치가 큰 문제… 토론형 리더십 보여줘야

'제왕적 대통령' 권력 분산하고 국회는 양원제 도입해 볼 만


독재 아니고선 만장일치 불가능… 국회선진화법 말도 안되는 제도

국정원 정치개입 근절하되 고유업무 지나친 견제는 안돼

한국의 정치시계는 1년 넘게 2012년 12월19일, 제19대 대통령선거일에 멈춰 있다. 국가정보원 선거 개입 의혹이 지난 한 해 여야 간 첨예한 정치쟁점이 되면서 한 해 나라살림인 예산안이 해를 넘겨 1월1일 새벽에야 처리되는 파행을 겪었다. 격렬해지는 여야의 대치 속에서 국회를 선진화하겠다던 그들의 외침은 더욱 공허하게 들린다. 정치권 스스로 문제해결능력을 상실하면서 우리 사회 원로들의 역할에 기대가 커지고 있다.

6선 의원에다 청와대 비서실장, 국회의장을 지낸 박관용(사진)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이사장을 찾아간 것도 이 같은 '정치의 실종'을 풀기 위한 혜안을 구하기 위해서다. 서울 반포동 집무실에서 인터뷰를 청하자 그도 "안타깝다"는 짧은 탄식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정치인은 역사라는 법정에서 영원한 피고인"이라며 "늘 고문당하는 기분과 같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지난 1967년 정치에 입문해 30여년 이상을 현실정치에 관여해온 선배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박 이사장은 우리 정치가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진단했다.

국민들이 반으로 갈라서고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대학가를 뒤흔드는 현상은 정치가 사회갈등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박 이사장은 2011년 미국에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라는 구호를 들고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왔을 때 "이건 의회의 책임이다"고 말했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발언에 동감을 표했다.

그는 "의회에서 이런 문제점을 가져와 토론하면 시민들이 의회에서 어려움을 대변한다고 생각해 덜 끓어오른다"며 "지금 국회의원들도 우리가 처한 위치를 생각하고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고 꼬집었다.

대화는 '안철수 현상'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다. 신년을 맞아 시행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올해 출범시킨다고 밝힌 신당의 지지율은 30% 안팎을 기록하고 있다. 기존 정당에서는 '새정치'를 내세운 안 의원이 별다른 콘텐츠를 보여주지 않는다며 애써 가볍게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안철수 현상 자체에 대해서는 "실체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치권이 양당구도가 아닌 다당구도로 변해야 한다'는 안 의원 측의 프레임에도 "양당구도가 나쁜 게 아니라 양당이 제대로 운영을 못하는 게 문제"라고 일축했다.

다만 그는 안철수 현상에 "무엇이 반영됐나를 주목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안철수에게 국민들이 몰려가는 이유는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 탓"이라며 "(여야는) 안철수를 겁내지 말고 국민들이 왜 안철수를 선택했는지 이유에 대해서 겁을 내라"고 덧붙였다.

그는 국회선진화법에 대해서는 "말이 안 되는 짓"이라고 비판했다. 국회선진화법은 다수결의 원칙을 무시하고 절대다수의 원칙을 도입한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그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 의회"라며 "독재나 전체주의가 아니고선 어떻게 만장일치를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결국 국회 선진화가 아니라 '식물국회'를 만들었다고 개탄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2004년 '탄핵정국'으로 흘렀다. 당시 박 이사장은 의장석을 점거한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질서유지권까지 발동하며 물리치고 탄핵소추안을 상정시켰다.

'중도·온건 성향'으로 평가 받던 그가 정치적으로 수많은 공격과 비난을 받았던 결단을 내린 순간이다. 그는 이후에도 이 때문에 탄핵을 찬성한 쪽과 반대한 양쪽 모두에게 양 극단을 오고 가는 평가와 비난을 받아왔다.

그는 "안건이 필요한 요건을 갖춰 올라오면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안건을 처리할 수 있도록 투표 절차를 밟아주는 게 국회의장의 역할"이라며 "의장에게 질서유지, 경호권 발동 같은 막대한 권한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못 박았다.

그는 또 "의장이 그냥 '골치 아프니까 안 하겠다'며 회피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짓은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며 다시 그 순간이 와도 똑같은 결정을 내리겠다고 분명한 어조로 강조했다.

그는 갈등 조정의 방법에 대해 선진화법 같은 제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주장을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리 나쁜 대화도 대화를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게 소신"이라며 "그것을 안 하는 게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라는 목소리를 높였다.

'일방통행' 논란을 빚고 있는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한 쓴소리도 쏟아냈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전봇대를 직접 뛰어가 뽑았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박 이사장은 "모든 것을 내가 하는 대로 따라와야 하고 책임도 내가 진다는 '대통령병'을 버려야 한다"며 "지금 시대는 전문화·다양화·다기화돼 대통령 한 사람이 철인정치를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집권 1년 차에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조언도 이어졌다. 핵심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주도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을 이해하고 '토론형 리더십'으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그는 "박 대통령은 완벽주의자이자 원칙주의자로 옆에 사람이 접근을 못한다"며 "장관도, 보좌진도(그 앞에서) 할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에 덧붙여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별칭이 붙은 현재의 대통령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5년 단임으로 돼 있는 현행 헌법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박 이사장은 1987년 국회 헌법 개정 기초위원을 맡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른바 '87년 체제'의 주춧돌을 마련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개헌 문제에 있어서 그는 현행 대통령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데는 회의적이었다. 내각책임제는 정당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한국은 그 정당활동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파벌과 계파정치가 횡행하는 등 부작용이 커진다는 지적이다. 여기에다 정경 유착의 문제도 더욱 극심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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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이사장이 주장하는 권력구조는 4년 중임제의 대통령제 아래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맞추는 방식이다.

그는 "헌법 개정 논의의 가장 큰 전제는 대통령에게 권력이 너무 집중돼 있으니 이를 분산하자는 것"이라며 "개인적으로는 임기 4년의 대통령 중임제가 가장 좋다고 본다"고 밝혔다.

문제는 현직 대통령이 자기 권한을 축소하고 사회적 논의가 개헌으로 쏠리는 데 부담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정권 초마다 터져나오는 개헌론은 매번 탄력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그는 현직 대통령을 설득하고 개헌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국회와 국회의원들이 움직여야 한다"며 의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다시 강조했다.

이와 함께 현재 단원제인 국회를 상하원이 존재하는 양원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추가했다. 그는 지금 단원제 구조에서 의회의 입법활동은 "선동을 통해 돼야 할 것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 돼야 할 게 통과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양원제를 통해 입법 절차에 신중을 기하자는 주장이다. 또 양원제는 현재의 국회의원 정원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80명은 상원, 나머지는 하원으로 나누는 방식으로 총원을 유지하자고 제안했다.

국회는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우리나라의 핵심 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을 개혁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지난해 말까지는 국회·정당·언론에 상시 출입하는 정보관(IO)제도를 없애는 등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작업을 했고 올해는 정보라는 본연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을 진행할 예정이다.

박 의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도와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개혁을 단행했던 경험이 있다. 당시 이뤄진 개혁은 국회에 안기부를 담당하는 정보위원회라는 특수 상임위원회가 구성되고 안기부 직원의 직권남용에 대한 처벌조항도 마련하는 등 안기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방식이었다.

야당 시절에는 숱하게 안기부 사찰을 당하기도 했고 청와대에 있으면서 직접 안기부에 메스를 댔던 그에게 지금 국회에서 이뤄지는 국정원 개혁에 대해 물었다.

그는 "국내 정치 개입은 근절해야 한다"면서도 "하지만 일일이 예산심의를 받아야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국정원이 갖고 있는 고유의 업무를 지나치게 견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국정원이 국익을 목표로 하는 '예외조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우방국 원수에 대한 도청을 단행해 파문을 일으켰지만 정작 미국 내에서는 큰 파문이 일지 않았던 점을 지적하며 정보기관의 특성이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선을 일정 부분 넘나들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박 이사장은 인터뷰를 마치면서 민주당이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기에 앞서 과거 집권 경험을 바탕으로 '역지사지'해볼 것도 충고했다. 10년간 여당을 하면서 국정운영과 국정원의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일방적 '여당 골탕먹이기'로 비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과거에 야당이 여당 되고 여당이 야당 되는 경험을 두번만 하면 우리나라 정치가 안정된다고 연설을 많이 했다"며 "그런데 우리 정치는 역지사지의 경험을 축적해야 하는데 당을 해산하고 당명도 바꿔버리면서 체험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여당인 새누리당을 향해서는 "여당에서 (야당과) 주례회동은커녕 월례회동도 하지 않는다"며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정치를 정상화시켜라"라고 충고했다. 그는 이어 "여당이라는 말은 정부와 국정운영의 공동책임을 느낀다는 뜻으로 넓은 의미에서 이 정권은 '새누리당 정권'"이라며 "여당이 책임의식을 갖고 야당이든 대통령이든 자꾸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 박관용 이사장은

첫 야당출신 국회의장·청와대 비서실장 지낸 정계 원로

노 전대통령 탄핵안 상정… 양극단 오가는 평가 받아

박관용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이사장은 최초의 야당 출신 국회의장으로서 '명예직'에 머물던 역대 국회의장들과 차별화되는 행보를 걸어왔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가장 각인된 사건은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 제출됐을 때 박 이사장이 질서유지권까지 발동하며 이를 본회의에 상정한 것이다. 그는 이 결정으로 수많은 비판과 공격을 받았지만 '다시 탄핵이 와도 나는 의사봉을 잡겠다'라는 저서를 남기며 결정의 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의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장이 총리의 시정연설 대독을 거부해 큰 파장을 낳기도 했다. 2002년 박 이사장은 청와대 만찬과 편지를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직접 시정연설에 나서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러나 연설 당일 김 전 대통령이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김석수 전 총리를 대신 내보내자 본회의 사회를 거부한 것이다. 얼마 후 본회의는 재개됐지만 그는 "지금까지 대통령이 나오지 않고 총리가 대독하게 한 것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로 보존할 가치가 없다"는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그간의 관행에 경종을 울렸다.

박 이사장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부 출신 정권이 끝나고 들어선 문민정부의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이라는 이력도 갖고 있다. 금융실명제 등 다양한 개혁이 시도됐고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는 등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비서실장직을 수행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아울러 박 이사장은 1991년 국회의원으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1994년 미국의 '북폭 위기'를 청와대에서 경험한 통일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남긴 "통일은 산사태처럼 온다"는 말은 아직도 통일 담론에서 숱하게 회자된다.

◇약력 △1938년 부산 △1957년 부산 동래고 △1961년 동아대 법정대 정치학과 △1981년 11~16대(6선) 국회의원 △1985년 남북국회회담 대표 △1987년 국회 헌법 개정 기초위원 △1990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석사 △1993년 김영삼 대통령 비서실장 △1994년 김영삼 대통령 정치특별보좌관 △1996년 국회 통일외무위원장 △1997년 신한국당 사무총장 △1998년 한나라당 부총재 △2002년 제16대 국회의장 △2004년~ 동아대 석좌교수 겸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이사장

대담=온종훈

사진=김동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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