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Culture & Life]첫 여성 국립국악원장 김해숙

국악에 숨결 불어넣고 마지막까지 연주자로 남는 게 꿈이죠

국악과 대중 거리감에 한때 허무함도 느꼈지만

우리 소리 콘텐츠 뛰어나 각광 받는 날 오리라 믿어

산하단체 작품 개발 지원 하반기 종합예술극 선뵐 것



빨간 저고리에 곱게 펴진 풍성한 치맛자락, 그 위에 살포시 얹어진 가야금을 통해 유려한 우리 가락이 흘러나온다. 무심한 듯 손가락으로 뜯는 가야금 소리가 단아한 한복의 맵시와 어우러져 묘한 울림을 안겨줬다. 현재도 우리 소리를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전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는 가야금 명인 김해숙(60·사진)을 지난 7일 오후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에서 만났다. 그는 이달 2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국립국악원의 수장이 돼 우리 소리 지킴이로 2년의 시간을 보내게 됐다. 국악원 63년 역사상 첫 여성 원장으로 새롭게 여정을 시작한 그로부터 국악과 함께한 지난 세월, 앞으로 그려갈 나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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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꾼 한 마디="국악이 겨레의 얼이다." 이 말 한마디는 열네 살 소녀의 가슴에 뜨거운 불씨가 됐다. 당시 숙명여자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고 고민하던 김 원장은 거문고를 배웠던 바로 위 언니의 영향으로 처음 가야금을 접하게 됐다. 국립국악중고등학교에 진학했고 큰 뜻 없이 시작한 우리 소리였지만 당시 교정에 쓰여 있던 '국악이 겨레의 얼'이라는 말이 김 원장에게는 남다른 마음의 울림이 됐다. "당시에 뭇사람들이 국악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시선이 느껴졌어요. 속된 말로 '기생 음악'이라는 거지요. 어린 마음에 이 같은 시선을 내가 바꿔보자는 마음이 불현듯 들더군요. 국악이 겨레의 얼이라는 말, 우리 소리에 담긴 예술적 힘이 저를 사로잡은 것 같습니다."


불현듯 다가온 이끌림 못지않게 김 원장이 가진 실력도 출중했다. 타고난 음악성보다는 또래 친구들이 '모범생' '독종'이라 부를 정도로 우리 소리에 쏟는 열정의 깊이가 그를 최고의 가야금 명연주자로 이끌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도 가족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 때 몰래 부엌 한편에서 가야금을 뜯었다는 그는 1972년 당시 국내 유일의 콩쿠르였던 5·16민족상 음악부 가야금 부문에서 특상(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남다른 재능과 열정으로 우리 소리에 혼을 쏟았지만 문득 회의감이 자신을 사로잡을 때도 있었다고 했다.

"중·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까지 10여년을 오롯이 가야금 연구에 힘을 쏟아 전문가로 사회에 발을 내디뎠지만 막상 뜨겁게 환영해주는 곳은 없더군요. 국악과 대중의 거리감이 상당했습니다. 도대체 '지난 세월 나는 무엇을 했나' 하는 허무함이 몰려왔습니다."

한 차례 고비도 있었지만 김 원장은 이내 마음을 바로잡았다. 우리 소리를 선보일 무대가 없다면 스스로 그 무대를 만들자는 포부로 직접 대중과 가까이 호흡하는 작업을 차츰차츰 해나갔다. 김 원장은 최초의 창작 가야금 3중주단 '서울세울가야금연주단'을 창단해 활동했고 국악계에서 음반 취입이 드물었던 때 가야금 연주앨범을 발매해 관객을 끌어안았다.

"예전에 강단에 섰을 때도 그렇고 최근에도 후배들을 만나면 꼭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소리가 지닌 원형 콘텐츠가 출중하기에 언젠가 제대로 각광 받는 날이 올 거라고 말이죠. 이런 희망마저 없다면 제가 왜 수십 년을 국악 하나만 붙들고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야학(夜學)에서 싹튼 사랑=국악밖에 모르던 그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사랑이 찾아들었다.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스물하나의 앳된 여대생은 서울 성북구의 돈암동성당에서 야학(夜學) 음악교사로 교육봉사를 시작했다. 당시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느라 마땅한 교육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을 위해 성당이 마련한 '배움터'였다. 그곳에서 김 원장은 지금의 부군(이종수 도서출판 어울림 대표)을 만났다. 가톨릭 모태신앙이던 이 대표 역시 그곳에서 교육봉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김 원장보다 여섯 살 위의 이 대표는 듬직한 남편으로서 손색이 없었고 특히 국악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둘을 평생 배필의 인연으로 이어지게 했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결혼하면 가사 일과 사회활동,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오롯이 힘을 쏟아야 하는 때였죠.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지만 둘 다 못할 게 뭐가 있나 싶어 결혼과 동시에 대학원 시험도 바로 치렀고 학업도 계속 이어갔습니다. 돌이켜보면 이런 세심한 남편의 배려와 지지가 있었기에 지금껏 제 능력을 조금이나마 국악 발전에 보탤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김 원장과 이 대표 사이에는 두 딸이 있다. 모두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성남시립국악단에서 가야금 연주자로 활동 중이다. 엄마의 재능을 오롯이 물려받은 국악 가족이지만 집 안에서만큼은 음악 이야기는 철저히 논외(論外)라고 했다.

"집에 돌아가서는 가야금·국악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아요. 일종의 영업비밀(?)이죠. (웃음) 우리 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김해숙 선생의 딸입니다'라고 소개 받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강요로 만들어지지 않고 또 각자 추구하는 예술세계가 있죠. 최대한 그것을 존중해주려고 합니다."

◇첫 여성 국립국악원장 & 평생 연주자의 꿈="제가 심심풀이로 인터넷을 통해 사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전생에 '호랑이'였다네요. (웃음) 가만히 있어도 남들이 퍽 어려워할 인상이니 유연하게 보일 수 있도록 개인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하더군요."

국립국악원장으로 오기 전 김 원장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비롯해 유수의 대학 강단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뭇 제자들에게 그는 호랑이 선생님으로 통한다. 깐깐하고 똑 부러지는 김 원장의 성격이 두루 작용한 탓이다. 기자가 처음 대면했을 때 역시 김 원장은 남다른 카리스마를 뽐냈다. 말수가 적어 함께할 인터뷰 시간이 조금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내 인터뷰가 시작되고 이야기가 무르익자 전혀 새로운 모습과 조우하게 됐다. 때로는 재치와 유머를 녹여 말을 건넸고 소녀처럼 해맑게 웃기도 했다. 화두를 던지며 풀어내는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모든 이들이 다 그렇지만 제가 양면성이 좀 두드러진 것 같습니다. 수줍은 듯하면서도 외향적인 면이 참 많죠. 저희 집이 8남매인데 어머니가 주로 집 안에서 가둬 키운 면이 없지 않아 있으셨어요. 어릴 때는 낯선 이가 집에 찾아오면 말도 못하고 숨기 바빴죠. 이 모습만 보면 정말 소극적이구나 하는데 고등학교 때 학생회 부회장을 할 정도로 적극적 기질도 제 안에 내재돼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시간적 여유가 허락되지 않지만 김 원장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군과 겨울이면 놓치지 않고 스키를 타러 다닐 정도로 남다른 취미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바깥사람이 야구선수 출신이에요. 스포츠에 남다른 관심이 있죠. 저도 덩달아 그 영향을 좀 받은 것 같습니다. 주택에서 20여년 살다 아파트로 이사 가서 제일 먼저 한 게 인라인스케이트를 산 거였습니다. 집 앞 놀이터에서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서 신 나게 타기도 하죠."

국악인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으레 가질 법한 선입견은 김 원장과 만난 후 이내 사라졌다. 그는 때로는 날카롭고 묵직하게, 때로는 부드럽고 유쾌하게 여성 리더가 지닌 강점을 살려 우리 소리에 다시금 숨결을 불어넣겠다고 했다. 김 원장은 재임 2년 동안 국립국악원 소속 4개 산하 예술단체(정악단·민속악단·무용단·창작악단)만의 고유 레퍼토리 개발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국립국악원 4개 예술단체가 총출동하고 지방 국악원 단원들까지 한자리에 모여 펼치는 종합예술극을 올 하반기에 선보일 예정이라고 했다.

국립국악원 수장으로서 행정적 일에 몰두함과 동시에 '가야금 명인'으로서 우리 소리를 지키는 데도 남은 힘을 쏟겠다는 것이 김 원장의 바람이다.

"(가야금) 연주자로서 손가락이 놓아질까 걱정입니다. 무대 위에서 평생 연주자로 남는 것이 마지막 꿈입니다."

■ 국악 대중화하려면

원형·정체성 고민하되 환경변화 빠르게 대응 관객과의 교감 넓혀야

지난 2일 '가야금 명인' 김해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첫 여성 국립국악원장으로서 행보를 시작했다.

임기 2년 동안 그가 그리는 청사진이 궁금했다. 우리 소리의 원형을 찾고자 그간 국립국악원이 쏟은 열정의 크기는 높이 평하지만 관객(대중)과의 친밀한 교감을 제대로 이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뒤따른다고 했다.

"국립국악원이라고 해서 단순히 옛 전통만을 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공연예술 환경이 급격히 변화한 만큼 국악원도 그 흐름에 빨리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형 보존에 치중하고 거기에 많은 정신을 쏟다 보니 관객의 취향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고 간극은 더욱 커진 것 같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거리를 좁히고 관객과 좀 더 친밀하게 호흡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에만 편승해 성급하게 국악 대중화를 이룬다는 욕심은 경계하겠다고 했다. 김 원장은 "우리 소리가 가진 전통성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가면 쉬운 길이 될 수는 있다"며 "그러나 대다수가 공감하듯 그 길은 정도(正道)가 아니다. 전통문화를 제대로 회복하기까지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듯 성급하게 서두르기보다 초석을 다시금 탄탄히 다지고 싶다"고 했다.

" '국악 대중화'가 비단 국립국악원만의 숙원 과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 원형과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제대로 진수를 맛보지 않고 '국악은 재미없어'라고 치부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서양음악(클래식)과의 단순 비교로 왜 국악은 이것만큼의 완제품을 내놓지 못하느냐 꼬집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레 되묻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 사회가 지금껏 그만큼 국악 교육에 에너지를 쏟았던 적이 있었는지 말입니다. 한국 고유의 소리는 세계 일류 유산과 견줘도 손색이 없는 독특한 특징과 빼어난 DNA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대한민국 땅에서는 환영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립국악원이 견인차 역할은 하겠지만 우리 소리가 제대로 꽃피울 수 있도록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열심히 물을 주고 애정으로 가꿔 우리 음악을 가다듬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She is …

△1954년 9월 부산

△1973년 국립국악중고등학교

△1977년 서울대 음대 국악과

△1980년 서울대 대학원 음악

학 석사

△2007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

국학대학원 문학박사

△1981∼1985년 대한민국예술

원 전문직연구원

△1998∼2013년 한국예술종합

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부교

수·교수

△2005∼2007년 국립국악원 국

악연구실장

△2007∼2010년 한국예술종합

학교 전통예술원장

△2012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

통예술원 음악과장

△2004년 ∼ 한국산조학회 회장

△2014년 1월∼ 현재 국립국악

원 원장

<주요 상훈>

△전국여고음악경연대회 가야

금 부문 특상

△5·16 민족상 음악부 가야금

부문 특상(대통령상·1972년)

사진=김동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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