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선진형 노사관계 정립/이종학 한화종합화학 사장(시론)

인류사의 전개과정에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자본과 노동이라는 생산요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이들 생산요소는 두 생산주체의 결합속에서 얻어진 이익의 배분에 있어서는 대립의 모습으로, 새로운 이익의 창출을 위한 시도에 있어서는 협력의 모습으로, 처해진 환경과 문화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유기적인 관계를 설정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60년대초 산업의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노사관계의 기본적 구도가 형성됐으나 개발독재가 지배해온 오랜 세월동안 근로자의 권리는 상당부분 유보돼야만 했다. 이후 80년대 후반 민주화의 물결속에서 우리 국민들은 정치·사회적 권리의 신장과 더불어 경제가치에 대한 각자의 몫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됐다. 이는 시대적 조류에 따른 당연한 현상으로 볼 수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다소의 시행착오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현장의 현실을 도외시한 노동운동의 단순이론적 접근이나 노동이라는 생산요소에 대한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미처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분배 문제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전례없는 구조적 경제위기를 맞고 있으며 이 위기를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21세기 새로운 환경에 맞는 장기비전을 설계해야 하는 시점에서 선진형 노사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가 노사일방의 상황논리를 적용해 한편의 일방적 희생을 담보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선진형 노사관계 정립을 위한 과제로 먼저 살펴 볼 것은 노사간 분배의 문제의 핵심인 근로자의 임금인상요구다. 이런 요구는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이며 기업가는 근로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직된 경영자원의 효율극대화를 부단히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전체 근로자들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 보다 중요한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지난 10여년간 피나는 투쟁을 통해 임금은 계속 올랐지만 우리 근로자들이 원하는 삶의 질이 과연 얼마나 향상되었는가를 생각해볼 때 우리가 근본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들과 우리근로자들이 현재 관심과 노력을 쏟고 있는 방향은 다소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건강한 삶은 질병이나 사고에 대비해 충분한 병원비를 준비해 둠으로써만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쾌적한 환경이 조성되고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요소들이 제거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자녀들의 건전한 성장도 거액의 과외비를 미리 마련해 놓아서 될 일이 아니라 과도한 사교육비를 지출하지 않아도 될만큼 교육제도의 혁신이 우리에겐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볼때 우리의 생활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은 제반 사회시스템과 관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소득이 생활의 패턴을 바꿀 수 있는 직접적인 요소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로지 임금의 인상을 통해서만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단편적인 생각은 자칫 근로자들로 하여금 아직도 노조활동을 대안없는 생존의 수단,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인식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의 노조와 그에 속한 근로자들은 단순히 임금인상만을 주장하는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엄연한 경제주체로서의 합당한 대우를 원한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비전이 어떠한지를 알기 원하며, 또 자신이 이루어낸 노동의 성과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받기 원하고 있다.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사측은 회사의 조직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의 비전을 제시하고 이에대한 근로자들의 공감과 이해를 구해야 할 것이다. 필요하면 경영설명회나 기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회사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성실하게 제공해야 할 것이다. 작금의 우리나라 경제가 총체적인 어려움에 처해있다고 해서 우리가 마냥 움츠리거나 현재의 구조적 부조리를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만다면 그야말로 우리는 선진국의 문턱에서 영원히 좌절하고 마는 불행한 국민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우리산업의 첨단기술력이 뒤떨어진다든가, 경제적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 천연자원의 부족 등 근본적인 문제나 고비용·저효율 구조의 혁신과 같은 장기적 과제는 각 분야별로 최적의 시나리오를 마련하여 꾸준히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나 정확한 상황인식에서 비롯되는 올바른 방향으로의 행동은 당장 가능한 일부터 과감히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일의 하나가 바로 선진형 노사관계의 정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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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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