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CEO&Story] 이희권 KB자산운용 대표

"입행 초기 은행업무 달달 외워 … 걸어다니는 규정집으로 불렸죠"


고객관리 위해 언제든 밥값 낼 수 있게 직원에 "끈 없는 신발 신어라" 주문

개인·법인영업·기업분석 두루 거쳐 33년 은행서 터득한 노하우 살려


지속성장 가능한 운용사로 키울 것


스피드스케이팅의 여제 이상화 선수가 처음 시작한 운동은 쇼트트랙이다. 쇼트트랙 입문 후 의도치 않게 얼굴을 다쳤던 그는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환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쇼트트랙으로 익힌 민첩성과 곡선주행 능력을 스피드스케이팅에 적절히 접목했기 때문이다. 쇼트트랙을 기반으로 한 고도의 스케이팅 기술 덕에 그는 세계신기록을 연거푸 작성했고 올림픽 2연패라는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금융투자업계에도 이상화 선수처럼 자신이 체득한 경험과 노하우를 다른 분야에 접목해 탁월한 성과를 내고 있는 인물이 있다. 이희권(59·사진) KB자산운용 대표다. 33년 동안 국민은행에서만 근무하다가 지난 2012년 계열사인 KB운용의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지난해 수장에 오른 이 대표는 국민은행 근무 시절에 익힌 업무경험을 경영에 적절히 활용하면서 지난해 업계 영업이익 1위라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통상 금융지주 산하의 운용사에 은행(지주) 사람이 수장으로 오면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이 대표는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KB운용을 더욱 탄탄한 운용사로 키워내고 있다.

"은행에서 30년 넘게 근무하다가 운용사로 넘어오니 문화가 많이 달라 처음에는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운용사의 자유분방한 문화를 존중하되 은행처럼 직원들의 충성도를 높이고 저의 전문 분야인 대체투자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확대해 회사가치를 끌어올리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직이 잦은 운용업계에서 적어도 KB운용만큼은 은행처럼 로열티(충성도) 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한 데 대해 그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은행맨으로 30년 넘는 외길 인생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원래 교사를 꿈꿨던 이 대표는 광주상고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치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옆자리에 있는 남자가 은행 원서를 쓰는 것을 목격했다. 호기심에 그도 은행에 원서를 넣었고 1978년 국민은행에 입사했다. 또래보다 3년 늦게 은행에 발을 들인 것이다.

"입행의 기쁨도 잠시, 또래보다 3년 늦게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입사 이후 야간대학도 다녔지만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학교도 그만두고 오로지 은행 업무만 팠습니다." 어찌나 은행 업무 공부에 집중했던지 그에게 '걸어다니는 규정집'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간석동·부평 등 인천지점에서 근무를 시작한 이 대표는 본격적으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행원급에서는 이뤄내기 어려운 고액 수신을 여러 차례 달성해 은행장 상 및 외부기관장 상을 수차례 수상했다.

1996년 기업분석팀으로 자리를 옮긴 후 기업 신용과 재무제표 분석을 통해 대출 연체율 하락에 크게 기여했던 그는 1997년 중소기업금융팀을 거친 뒤 2002년에는 구리기업금융팀 개설준비위원장 발령으로 처음 지점장 보직을 맡는다. 그가 국민은행 근무기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시절로 꼽는 때이기도 하다.

"입사 이후 단 한 차례의 술자리 없이 우수하게 업무를 처리해왔는데 조직의 장이 되고 나니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참석해야 할 때가 많더군요. 직원들에게 무한한 책임감을 느껴 입행 후 24년 만에 술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는 직원들에게 '끈이 없는 신발을 신을 것'을 주문했다. 고객과 식사를 한 뒤 신발끈을 묶는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어 밥값을 내지 않는 소위 '갑질'을 하지 말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기업에 대출을 해주는 은행이 갑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지만 고객 관리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밥값을 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이처럼 사소한 것 하나에서부터 신경을 쓰면서 고객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확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구리기업금융지점장에 이어 영등포기업금융지점장 및 명동법인영업부장을 차례로 맡으면서 매년 업적평가에서 금·은·동상을 휩쓸었다

기업금융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던 그는 2008년 국민은행 투자금융본부장에 오른다. 그가 지금의 명성을 얻은 것도 바로 이때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부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폭탄이 쌓이는 상황에서 그는 국민은행 각 지점에 흩어져 있던 부실 PF를 본부로 흡수, 집중 관리해 부실 PF를 털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인천대교·경춘고속도로·포천복합화력발전소 건설에 투자하면서 사회간접자본(SOC)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대체투자 전문가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33년간 몸담았던 국민은행을 떠나 2012년 KB자산운용 부사장으로 부임한다. 새로운 분야에 발을 들였지만 그는 걱정이 없었다. 이미 은행에서 개인·법인 영업, 기업분석, 투자금융, 전략기획, 재무회계 등 모든 업무를 두루 거쳤던 만큼 이 경험을 KB운용 경영에도 적극 활용했다.

주식형 펀드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던 KB운용은 이때부터 이 대표의 진두지휘 아래 부동산 등 대체투자 분야도 강화한다. 부산 거가대교 운영권을 비롯해 GS파워의 강릉 화력발전소, 서울 양평동 이레빌딩, 서울 합정동 세아제강빌딩 등 굵직한 SOC와 부동산 투자 등이 그가 부임한 후 KB운용이 이뤄낸 성과다. 지난해 7월 KB운용 대표직에 취임한 후 현재까지 특별자산 펀드 수탁액과 부동산 펀드 수탁액은 각각 3조6,099억원, 8,361억원으로 늘어났다.

그는 "저금리·저성장 시대에 중위험·중수익을 추구할 수 있는 대체투자가 매력적"이라며 "특히 자산운용사들이 해외진출을 도모하기 가장 쉬운 분야가 대체투자인 만큼 은행에서의 경험을 살려 관련 부문 역량을 강화해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올해 경영전략을 포트폴리오 다변화로 정했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주식형 펀드와 대체투자를 기반으로 다른 분야의 경쟁력도 강화해 국내 대표 종합자산운용사로 거듭나겠다는 계획이다.

이 대표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패시브(passive) 자산 확대다. 패시브 자산이란 펀드매니저의 재량에 따라 종목을 편입하는 액티브펀드와 달리 벤치마크 지수 대비 초과 수익을 추구하는 인덱스펀드나 상장지수펀드(ETF) 같은 상품을 말한다. 최근 저금리가 장기화되면서 수수료가 많이 들어가는 액티브펀드보다는 비용이 저렴한 패시브 상품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그룹 차원에서 강조되는 시우금융(時雨金融) 지침에 따라 고객이 필요로 하는 고객중심 상품도 적기에 공급할 예정이다. KB운용은 중위험·중수익 트렌드에 따라 롱쇼트펀드 수요가 급증하자 올해 초 국내 주식을 대상으로 롱쇼트 전략을 구사하는 'KB코리아롱숏'펀드와 한국·일본 주식을 대상으로 하는 'KB한일롱숏'펀드를 내놓았다.

그의 장기인 대체투자 분야 규모도 지속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기관투자가의 니즈에 맞춘 능동적인 상품개발로 대체투자 시장확대에 앞장설 방침이다. 그는 "일반 개인투자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대체투자 펀드 론칭도 계속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동안 단점으로 지적돼왔던 운용사 문화를 변화시키는 데 노력할 의지를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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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운용사 최고경영자(CEO)는 단기실적을 창출하는 데만 급급했고 펀드매니저들은 이직이 잦았습니다. 반면 은행은 장기적 관점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회사에 대한 조직원들의 로열티를 키워 조직가치를 극대화합니다. 펀드매니저를 비롯한 조직원들의 창의성을 살리되 은행의 장점도 접목시켜 KB운용을 지속 성장이 가능한 운용사로 키우고 싶습니다."











●이희권 대표는

△1956년 전남 담양 △1975년 광주상고 △1978년 국민은행 입행 △1978~2002년 국민은행 영업부·기업분석팀·중소기업부·동부지역본부 △2002~2004년 국민은행 구리기업금융지점장 △2004~2008년 국민은행 영등포기업금융지점장 △2008년 국민은행 명동법인영업부장 △2008~2011년 국민은행 투자금융본부장 △2012~2013년 KB자산운용 부사장 △2013년 7월~ KB자산운용 대표이사













리스크 관리·투자자 보호 위해 업계 첫 금융소비자팀 신설



이희권 대표가 KB운용 수장을 맡으면서 집중하는 것 중의 하나가 리스크 관리다. 운용사가 은행과 달리 리스크 관리에 상대적으로 소홀한 측면이 있음을 느끼고 이를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은행과 달리 운용사는 투자에서 손실이 발생할 경우 별도의 책임을 지지 않고 있으며 이는 고스란히 투자자들의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며 "사전 관리를 철저히 해 손실을 최소화하는 리스크 관리 시스템 정착에 역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취지에 발맞추어 KB운용은 지난해 8월 업계 최초로 금융소비자팀을 신설했다. 리스크 관리와 투자자 보호에 앞장서기 위한 선제적 조치였다. 지난해 12월에는 금융사고, 비리 예방 및 건전한 금융거래질서 확립을 위한 자정결의대회를 실시했으며 이 밖에 △펀드 관련 정보 제공을 위한 판매사용 펀드레이더 발행 △펀드 사후 관리 차원으로 펀드매니저 코멘트 수시 제공 △장기성과 중심의 매니저 평가 시스템 구축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또 KB운용은 펀드매니저의 1인당 운용펀드 수를 최대한 줄이면서 펀드 운용시 업계 평균 이하의 매매회전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중장기 투자문화 정착에 앞장서고 있다.

이 대표는 "연 30억원 수준의 비용을 들여 리스크 관리를 위한 전산 시스템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며 "기업이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리면 오래 갈 수 있듯이 운용사도 리스크 관리에 투자하면 지속 가능한 기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운용사들이 리스크 헤지 기능이 없는 상품을 판매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투자자 보호 측면에서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상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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