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부시-케리, 정치판 첫 도전 실패경험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존 케리 상원의원 모두 정계진출 첫 도전에서 실패한 아픔이 있었으나 그 뒤 같은 전철을 좀처럼되풀이하지는 않았다고 16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전했다. 잇단 여론조사 결과가 엎치락 뒤치락 하고 있는 가운데 LA 타임스는 이날 '부시와 케리, 실패 교훈' 제하의 기사에서 텍사스, 매사추세츠주에서 각각 하원의원에출마했다가 실패했던 부시 미 대통령과 케리 민주당 대선후보의 '과거'를 끌어냈다. 케리는 1972년 매사추세츠주 제5지구에서 하원의원에 도전했으나 고배를 들었다. 당시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베트남참전용사들(VVAW)'을 이끌며 반전시위를 주도, 미 전역에서 주목을 받았다. 부시 또한 유명 정치인인 아버지 부시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1978년 서부 텍사스제19지구 하원선거에 뛰어들었다가 전기작가 빌 미누나클리오의 표현대로 "황야에서한 방 먹었다". 케리는 정치입문 실패에 대체로 공개적으로는 말을 아끼고 있지만 역사학자인더글러스 브링클리는 "그 경험은 그의 영혼(psyche)을 크게 상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타임스는 덧붙였다. 베트남전 참전으로 28세에 은성, 동성무공훈장에 3개의 명예 전상장을 받았으며워싱턴 D.C. 의사당에서 반전시위를 주도하고 상원 외교관계위원회 청문회 TV중계를통해 뉴욕 포스트 등에서 '이 시대의 인물, 들끓는 반전 시위속에 탄생한 정치스타'로 찬사를 받았으나 그 모든 관심은 케리를 연방 하원에 진출시키는데 도움이 되지못했다. 케리는 당시 제4지구 출마를 고려, 아내 줄리아와 함께 블루컬러들이 몰려있는로월시(市)에 집을 샀다. 그러나 그는 선거구 조정으로 한 달 뒤 5지구가 개설되자이 곳에 출마했지만 정적들이 '뜨내기 정치인'으로 비난하고 보스턴 헤럴드 트래블러 등 지역신문들도 이를 혹평했다. 곡절 끝에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 폴 그로닌(공화), 로저 더킨(무소속)과 맞섰지만 케리의 형제인 캐머론과 선거참모 토머스 밸러리가 전날 선거대책본부에 인접한 빌딩 지하층에서 전선 절단 및 무단침입 혐의로 체포되는 악재에 휘말렸고 결과는 뻔했다. 부시 역시 26년전 19지구 하원의원 패배 '과거'를 대통령 재선을 위한 선거캠페인에는 거론하지 않고 있지만 그 때 아픔은 여전히 사라지지않은 상태라고 신문은전했다. 부시가 황량한 서부 텍사스에서 자전거를 타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선천적인 문제들로 곤욕을 치렀는데 석유자원이 풍부한 퍼미언 베이신이 아닌 동부 코네티컷 태생이라는 딱지가 한동안 따라붙었다. 학업 등을 마치고 44년간 하원의원을 지낸 민주당 조지 매헌 의원의 은퇴 결정으로 부시는 1977년 7월 제19선거구 출마를 굳히고 넉 달 뒤 미 중부출신의 로라 웰치와 결혼해 본격적인 유세에 나섰다. 그러나 부시의 정치입문 시도는 또 다른 전국 규모의 전투, 즉 1980년 공화당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조지 부시-로널드 레이건간 경쟁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됐다. 당시 레이건은 공화당 제19지구 하원의원 경선에서 20년 이상 토박이인 짐 리스 전(前) 오디사 시장을 밀었다. 부시도 케리와 마찬가지로 곡절 끝에 리스를 꺾고 12월 켄트 핸스 주 상원의원(민주)과 격돌했으나 결과는 패배. 핸스 민주당 후보는 당시 53%의 득표로 '아버지' 조지 부시가 기금모금에 동원시킨 당시 윌리엄 포드 포드 모터스 부회장 겸 포드社 사장, 보위 쿤 전 미국 프로야구(MLB) 커미셔너,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 등을 업고 막강한 자금력으로 TV선거공세를 퍼붓던 부시를 보기 좋게 무너뜨렸다. 그 뒤 핸스는 당적을 옮겨 부시의 친구이자 선거자금책이 됐으며 부시는 1994년앤 리처즈 현직 주지사를 꺾고 텍사스 주지사가 될 때까지 정치권 밖에 머물렀다고타임스는 덧붙였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김용윤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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