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에 적응한 기업에 한해 경기가 살아나는 것이 지금 일본경제의 모습입니다. 모든 업종이 경기순환상 상승 사이클을 타는 일은 일본이든, 한국이든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외국인 근로자, 해외 기업 등을 적극 유치하기 위한 구조개혁에 적극 나서야 할 때입니다.” 일본 2위 민간 싱크탱크인 일본종합연구소(JRI)의 기모토 야스유키(木本泰行ㆍ56ㆍ사진) 사장은 고령화 현상과 산업 공동화, 소비 부진, 비정규직 근로자 문제 등 한국과 일본이 공통적으로 겪는 제반 문제들에 대해 “시장의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개혁을 통해 공백을 새롭게 메울 수는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억지로 룰(rule)을 만들어도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고, 그 결과 시장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며 “앞으로는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새 시대에 적응하는 기업만이 살아남는 경제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쿄 치요다구의 JRI 도쿄본사에서 기모토 사장과 나눈 대화는 주로 일본의 경제와 기업에 관한 것이었지만 글로벌 경제의 동조화 현상과 한일 간의 특수한 관계 등을 감안할 때 한국의 경제와 기업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은 경기회복이 대기업ㆍ제조업 중심에서 중소기업ㆍ비제조업으로, 또 수출에서 내수회복으로 점차 확산되는 추세인데 이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이 있었는가. ▦아직 경기회복 과정에서 정부가 한 역할을 평가하기란 어렵다. 다만 이전 고이즈미 정부가 기업을 도와주지 않는 정책을 펼친 것이 기업의 정부의존도를 낮추고 기업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게 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효과를 유도했다고 할 수 있다. 정부로서는 재정적자 때문에 도움을 주지 못한 것 뿐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기업의 자생력을 키웠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중소기업 경기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내수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기대한 만큼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같은 지적이 과거 버블경제시대 수준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데 따른 실망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과거의 호황경기를 기대한다면 지금의 회복속도는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경기가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내수가 생겨나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한 중소기업에 한해 경기가 살아나는 것이 지금 일본경제의 모습이다. 앞으로는 경기순환상 모두가 상승 사이클을 타는 것이 아니라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경제가 새로운 지평으로 넘어간다고 봐야 한다. -한국의 경우 경기회복이 수출에서 내수로 확대되기 위한 방안이 있다고 보는가. ▦사실 내수지표가 눈에 띄게 회복되기는 어렵다. 일본 역시 전체 지표를 보면 내수는 여전히 답보상태다. 내수가 꾸준히 상승하기 위해서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거나 절대적인 경제수준이 낮은 상태이거나, 임금수준이 급증하는 등 요인이 충족돼야 하는데 한국과 일본 모두 이 같은 조건에는 이미 해당사항이 없다. 다시 말해 지금 상태로는 더 이상 내수가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는 대전제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앞으로 내수가 총체적으로 확대되려면 외국인 근로자가 대거 유입되거나 인구감소를 보완하거나 해외기업을 적극 유치하는 등 나라의 전반적인 구조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우수한 두뇌의 해외유출이 급증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조용한 두뇌유출이 일어나고 있다. 아직 대규모는 아니지만 교육이나 사회적 폐쇄성 등에 불만을 느끼는 고급인력은 이미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런데 두뇌의 해외유출 자체는 장기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해외 유학생들이 늘어나는 것은 국내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외국어 문제와 교육 문제를 자연스럽게 조정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고급인재가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것은 국내에 그만큼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현상이므로 개선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재미있게 일을 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이 글로벌 인재를 유치할 수 있는 길이다. -제조업 공동화도 심화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해외진출기업의 U턴 현상도 나타난다고 하는데. ▦본질적으로는 일본에서도 산업의 ‘U턴’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일단 시작된 해외진출 흐름을 되돌리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공동화된 자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이미 해외로 빠져나간 산업을 되돌리려고 애쓰기보다 다른 산업으로 빈 자리를 메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노인수발 등 국내 서비스산업을 활성화하거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소프트웨어 개발 산업을 지방에 육성하는 등의 방안이 대표적이다. 가령 지방에서 인구가 줄어들고 일자리가 줄어들면 인건비도 낮아지기 마련이다. 반대로 기업들이 몰려간 중국의 경우 점차 인건비가 높아지고 엔화 가치 하락으로 비용부담도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보다 국내의 지방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것이 오히려 기업 입장에서 유리할 수도 있다. 물리적인 거리가 크게 문제시되지 않는 정보기술(IT)산업이나 고령화사회를 겨냥한 노인수발 관련사업 등은 기업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메우는 효과가 클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정책적인 뒷받침도 필요할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면서 일본의 노동시장은 상당히 유연해진 것으로 보인다. ▦일련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고용에 대한 일본인들의 가치관이 달라졌다. 일류대학을 나와서 대기업에 취직하고 승진을 거듭하는 것에 가장 높은 가치를 두던 과거의 단순한 사고구조는 대기업의 채용급감과 인원감축으로 인해 무너진 상태다. 안전고용을 기대하던 대기업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해 일본에서는 다른 방식의 고용, 다른 가치관이 확립되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는 경기가 나아지고 고령 인구의 대거 정년퇴직을 앞두면서 인력부족 우려를 하게 된 대기업들이 인력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가치관이 역행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 모두 비정규직 근로자 문제가 심각하다. ▦원칙적으로는 비정규직 문제에서도 시장 원리를 우선시해야 하지만 정책적으로는 시장에만 맡길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시장 원리에만 의존하면 변화가 과도하게 나타날 수 있는 반면 정책적으로 룰(rule)을 만들 경우 시장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계약직을 2년 이상 고용시 정규직으로 전환시킨다는 한국의 비정규직보호법과 같은 규정은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당초 취지를 왜곡시킨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찬성할 수 없다. 일본에서도 정부가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보험이나 복리후생을 제고해야 한다거나 비정규직의 최저임금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이렇듯 현실과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일반론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포함한 다양한 고용형태를 도입하고 공통된 사회보장을 적용하는 등 고용시장이 보다 유연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경제성장에서 중국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기업들 입장에서 내수 시장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해외나 국내가 똑같이 기업의 시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은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여러 의미에서 미개척 시장이라는 점에서 생산기지로서나 판매시장으로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시장이라고 본다. 물론 수년 뒤에는 중국의 경제규모가 일본을 앞지를 것으로 전망되지만 정치적인 파장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단순한 규모의 확대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중국 경제가 일본보다 커져도 경쟁력 면에서 일본에 위협을 가할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시장에 대한 적응시점이 늦어질수록 경쟁력의 격차는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적어도 앞으로 10년간 일본기업의 기술력은 중국과의 격차를 더욱 벌릴 것으로 예상한다. -앞으로 일본경제를 견인할 산업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당분간은 기존 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부는 또 다른 성장동력 육성을 바라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기존의 자동차나 전기전자를 대체할 산업은 나오지 않고 있다. 가령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이 해외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지만 실제 현금창출 면에서 경제적인 효과를 보면 자동차산업을 능가할 수는 없다. 서비스 산업은 분명 성장동력으로서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지만 서비스 산업을 대규모로 육성하기에는 고령화 사회 일본에서 서비스 제공인력의 절대적인 부족이 제한요인으로 작용한다. 앞으로 외국인 노동력 유입이 활성화돼 서비스 제공인력 부족문제가 해결된다면 노인수발 등을 비롯한 서비스 산업이 매우 큰 규모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이 과거 경제거품을 걷어내기 위해 실시한 긴축정책이 일본의 10년 불황을 초래한 것으로 지적됐는데 자산가격 급등에 대응하는 한국의 통화당국에 조언이 있다면. ▦일본의 거품경제에서 한국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경제가 과열 조짐을 보일 때는 초기에 진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일본은 플라자합의 이후의 내수 확대가 부동산 개발 열기로 이어져 버블이 형성됐는데 초기에 이를 간과한 결과 너무도 큰 아픔을 겪어야 했다. 만약 과열경기 초창기에 제동을 걸었다면 아주 가벼운 통증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 과거의 일본처럼 부동산투자의 레버리지가 크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일본은 신용으로 얻은 은행 융자로 토지를 매입하고, 이를 담보로 또다시 융자를 얻어 투자를 거듭하는 레버리지 때문에 버블이 형성됐는데 한국은 그만큼 극심한 레버리지가 일어난 것도 아닐 뿐더러 은행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아 문제의 심각성은 덜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버블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는 것은 한국에서도 과열 억제를 위한 조기 대처의 필요성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금부터 어느 정도의 긴축대응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식회사 한국’의 경영에 대한 컨설팅 제언을 한다면. ▦한국이 풀어야 할 과제는 기업의 소유와 경영 분리다. 한국 기업이 앞으로도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 그에 따른 투명성 제고와 개방 경영이 필요하다. 일본의 도요타를 예로 들면 이 회사는 분명 도요타 가문의 기업이긴 하지만 일가의 지분이 많지도 않을 뿐더러 벌써 3대째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 있다. 반면 한국의 대기업은 사실상 창업주 가족의 지분 소유와 경영이 이뤄지고 있다. 그렇다고 오너 일가의 역할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도요타 역시 실제 경영은 전문경영자가 맡고 있지만 창업주 가문이 상징적인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가령 미국 자본이 도요타 지분을 일부 매입한다고 해도 도요타가 미국계로 넘어갈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도요타가 무조건 좋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기업의 소유와 경영 분리는 앞으로 한국이 풀어가야 할 큰 과제임이 틀림없다. ◆약력 ▦49년생 ▦71년 교토대학 경제학부 졸업 ▦71년 스미토모은행 입행 ▦88년 스미토모은행 런던지점 부지점장 ▦91년 동행 유럽영업부 부부장 ▦95년 동행 요코하마지점장 ▦96년 동행 미주본부 미주총괄부장 ▦97년 동행 국제총괄부장 ▦2002년 미쓰이스미토모은행 상무 겸 유럽본부장 ▦2003년 유럽미쓰이스미토모은행 사장 ▦2005년 미쓰이스미토모파이낸셜그룹 전무 ▦2006년 일본종합연구소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