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리빌딩 파이낸스] <1부> 블루 프린트를 다시 그려라 1. 금융의 기본 '신뢰'를 찾는다

원칙도 뒤흔드는 '금융 정치화' 차단… CEO 책임경영 강화해야 <br>권력 측근들이 요직 차지, 예금자 보호한도까지 훼손<br>"지배구조 문제 해결 등 경쟁력 강화 위해 산업전반 손봐야 할 시점"



부실로 문을 닫은 부산저축은행 초량동 본점. 문을 닫은 지 몇 달이 지났건만 여전히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이미 팔렸거나 매각절차를 밟고 있는 다른 계열사들과 달리 부산저축은행은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예금자 수십명이 본점을 점거한 탓이다. 벌써 농성 100일을 넘겼다. 이들의 요구는 한결같다. 정부가 5,000만원 이상 예금과 후순위채를 모두 보상해달라는 것이다. '1인당 5,000만원 예금 보장'. 이 제도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우리 스스로 만든 '금융의 불문률'이다. 하지만 환란 발생 13년이 흐른 지금, 금융의 기본은 허무하게 짓이겨지고 있다. 금융산업의 큰 원칙보다는 감정적 호소에 눈이 멈추는 것이 대한민국 금융의 현실이다. 우리 금융산업은 두 번의 위기이자 기회를 마주했다. 1998년과 2008년, 10년 주기로 찾아온 위기는 많은 교훈을 남겼다. "대마불사는 없다" "내 돈은 내가 지킨다"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국민 서로가 약속한 '신뢰의 산물'이었다. 그렇게 쌓아온 소중한 원칙들이 무너지고 있다. 금융회사의 장부를 믿을 수 없고 대형 금융지주회사들은 '그들만의 리그'에 갇혀 경영진 공백상황을 만들었다. 당국의 대응 또한 환란의 우등 졸업생이라는 닉네임을 무색하게 했다. 금융회사들은 우물에 갇혀 예대마진에 의존하는 천수답식 경영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위기가 엄습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더 늦기 전에 금융의 신뢰를 복원하고 한 단계 도약할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고언한다. 김태준 금융연구원장은 "위기극복에 관심이 쏠리다 보니 금융권이 신뢰 문제를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며 "금융회사들이 이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을 빨리 추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잃어버린 금융산업의 '기본'=금융산업은 신뢰가 생명이다. 미국의 모기지 사태에서 보여주듯 신뢰가 깨지면 금융은 패닉에 빠진다. 우리 금융산업에서 신뢰의 수준은 어떤가. 불행하게도 '역류'라는 표현이 옳을 정도로 퇴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저축은행 대주주들을 상징으로 한 모럴해저드는 금융산업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그들은 백주대낮에 고객을 속였다. 당국의 검사 때마다 수십%씩 자기자본비율이 낮아지는 해괴한 상황, 금융회사의 장부를 믿을 수 없는 현실에서 신뢰가 형성될 리 없다. 믿음이 없는 상황에서 고객이 내 돈을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래도 깨서는 안 되는 원칙이 있다. 사연은 너무나 안타깝지만 5,000만원 이상 초과자의 손실을 보전하겠다며 정치권까지 나선 것은 근본을 훼손하는 일이다. 금리가 높은 곳과 거래할 때는 그만한 위험을 떠안아야 한다는 기본도 무시됐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원리는 자본주의에서 통용되는 불변의 진리다. 가계대출이 많다는 당국의 지적에 하루아침에 여신을 중단하는 모습은 우리의 초라한 금융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뱅크런에 법적 근거도 없이 셔터를 닫는 도민저축은행은 금융의 후진성을 드러냈다. 우리금융 매각 과정에서 계속 흔들린 원칙, 하나은행의 외환은행 인수 과정에서 보여준 관료들의 '변양호 신드롬'은 당국과 금융회사 간 신뢰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줬다. 전산 해킹으로 잇따라 고객정보가 털리는 모습 역시 신뢰의 붕괴 현장이었다. ◇금융의 정치화 배격하고 CEO 책임경영 강화해야=물론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다. 과점이었기 때문에 고객에게 믿음을 주거나 금융회사의 신뢰도를 높이는 것은 소홀했다. 사람이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체계는 갖춰졌지만 이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다. 그 결과 우수한 지배구조를 갖춘 지주회사조차 최고경영자(CEO)와 사외이사가 결탁하는 일이 발생했다. CEO의 책임경영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국내 금융산업은 사실상 과점이어서 고객이나 신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에 몰두한 측면이 있다"며 "CEO의 책임경영 의무를 보다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 무엇보다 차단해야 할 부분이 '금융의 정치화'다. 대통령 측근이 금융회사들의 요직을 차지하고 사외이사는 물론 자회사의 감사와 임원까지 자리하는 낙하산이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다. 금융에 정치색이 끼게 되면 돈의 흐름은 왜곡된다.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힘 있는 정치집단이 우리의 금융산업을 정치화했다"는 한 시중은행장의 말이 뼈에 와닿는다. ◇새로운 블루프린트 만들어야=신뢰를 되찾으려면 새 청사진을 제시하는 게 급선무다. 뼈대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김석동 현 금융위원장은 금감위 감독정책국장 시절 '블루프린트'를 만들어 우리 금융의 앞날을 보여줬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지금의 금융산업은 목표가 뚜렷하지 않다. 우리금융 민영화는 또다시 좌초되면서 금융산업을 어떻게 재편할지에 대한 논의마저 실종됐다. 그러다 보니 국내 은행들의 경쟁력도 제자리걸음이다. 덩치가 가장 큰 국민은행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계 60~70위권을 맴돌고 있다. 큰 밑그림이 그려지면 은행 간 짝짓기나 국책금융기관 재편 등의 세부 추진과제가 명확히 드러난다. 세계적 투자은행(IB) 육성도 보다 손쉽게 가능해진다. '거수기 사외이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배구조 보완방안, 해킹 사건에서 드러난 CEO의 책임경영 확대 등도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이 담긴 종합적인 금융산업발전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다. 이 속에서 국민은 금융산업에 대한 믿음을 다시 갖는다. 그것이 바로 신뢰를 복원하는 요체다. 서병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원칙이 없다 보니 금융의 신뢰가 깨지고 외국인 투자가들도 불만을 갖게 된다"며 "금융산업의 전반적인 틀을 다시 한 번 손봐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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