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재벌정책 부드러워지나

최근 정부의 5대재벌에 대한 압박 강도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언뜻 봐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지만 지난 4월27일 청와대의 정재계간담회를 전후해 정부가 미세하게 보폭을 조절하면서 기존에 강조해온 정책들을 한걸음씩 수정하는 징후가 엿보이고 있다. 정부의 이같은 움직임은 재벌들에게 일정한 원칙아래 개혁을 강요하던 강압국면에서 일단 재벌의 실체를 인정하고 타협을 통해 구조조정을 진행하려는 유화국면으로 재벌정책의 기조가 변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금감위는 그동안 재벌계열 부실사의 금융기관 부채는 오너와 그룹이 책임져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해 왔다. 이에 대해 재벌들은 법을 무시한 「팔 꺾기」라며 불만을 제기해 온 실정이다. 그런데 이같은 원칙이 변할 조짐이 비치기 시작했다. 오호근(吳浩根) 기업구조조정위원장은 최근 삼성자동차의 처리문제와 관련, 『말도 안되는 결정을 방조한 은행도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자동차의 금융기관여신 4조원을 삼성이 모두 다 책임질 필요가 없고 부실기업에 대출한 금융기관도 책임을 나눠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동안 금감위가 견지해온 원칙을 정면으로 뒤집는 말이다. 금감위는 계열사가 삼성자동차의 부채에 대해 지급보증을 하지 않았지만 금융기관들이 삼성그룹의 신용을 보고 여신을 일으켰으므로 전적으로 삼성그룹이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금감위 당국자는 『吳위원장은 삼성자동차문제에 책임있는 답변을 할 입장이 아니다』면서 『기존 원칙은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이헌재(李憲宰)금융감독위원장은 지난 22일 광고주협회초청 오찬간담회에서 기존 원칙을 완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李위원장은『소액주주의 목소리가 커지고 외국인지분율이 높아진 상황에서 예전과 달리 계열부실사의 책임을 그룹에 모두 지우기 힘들다』고 말해 묘한 뉘앙스를 던졌다. 오찬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삼성자동차 처리원칙을 수정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李위원장은 『원칙은 변함이 없다』면서 『상황이 어려워진 만큼 그룹이 문제를 처리하기 쉽지않다는 말을 한 것이다』고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李위원장의 발언직후 吳위원장이 미묘한 문제를 다시 언급한 점은 예사롭지 않다. 정부가 원칙보다 현실을 중시하기 시작한 대표적 사례는 5대재벌의 생명보험업진출 제한 규정의 완화 움직임이 꼽힌다. 지금까지 정부는 2개 부실사를 인수해 정상화시켜야만 5대재벌의 생보업 진출을 허용한다는 원칙을 공공연히 밝혀 왔다. 그러나 최근들어 이를 일부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대한생명 인수에 의욕을 보이고 있는 LG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 대한생명을 비싸게 팔기 위해서다. 대한생명은 현재 부채가 자산보다 3조원 가량 많은 상황이다. 현행대로 처리할 경우 프랑스의 악사(AXA)사, 미국의 매트로폴리탄, LG간에 3파전으로 벌어지고 있는 대한생명 인수전은 정부에게 불리하게 진행될 공산이 크다. 예컨대 LG는 입찰에서 2조5,000억원을 써내고 다른 경쟁자가 1조원씩을 제시하더라도 LG가 대한생명을 낙찰받을 수 없다. 부실(3조원)을 다 정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한생명은 1조원을 써낸 다른 외국인 경쟁자에게 넘어간다. 부족분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메꿔야 한다. 이런 점때문에 금감위는 재벌규제라는 명분보다 실리를 더 중시, 5대재벌에 대한 생보업 진출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게 된 것이다. 정부는 지난 4월27일 정재계간담회를 통해 빅딜을 지원하기 위해 외자유치이후에야 금융기관여신의 출자전환을 허용하겠다는 원칙을 일부 수정, 선(先) 출자전환을 허용키로 했다. 동일계열 여신한도에 예외를 인정하고 금리도 인하할 수 있다는 입장도 표명했다. 무조건 원칙만 고수하느라 구조조정을 지연시키기 보다 일단 일을 되게 만들자는 입장으로 선회한 셈이다. 최근 재벌정책의 원칙이 미묘한 수정으로 선회케 된 배경은 정부가 가진 힘과 시간의 한계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내각제개헌 논란, 16대 총선 준비 등 정치이슈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전에 재벌개혁을 매듭지으려면 일 처리에 속도를 붙여야 한다. 따라서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가진 재벌과 일정부문 타협하며 가능한 부분부터 마무리해 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금감위 당국자는 『재벌 구조조정과정은 밀고 당기기의 연속이었다』면서 『부분적으로 원칙을 양보해도 이는 재벌개혁을 성사시킨다는 큰 틀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재무구조 개선, 투명성 강화, 독립경영이라는 큰 틀에 대해서는 추호도 양보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원칙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대우그룹은 대우조선 매각 등을 포함한 구조조정안을 발표했고 금감위는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대우는 그러나 매각 반대입장을 밝힌 노조에 밀려 매각계획을 없던 일로 하기로 노사합의를 했다. 정부일각에서는 매각대신 합작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약속을 한 뒤 여러 핑계를 들어 이를 뒤집는 관행이 지속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재벌개혁은 아직껏 「약속」이 대부분이고 「실천」은 적었다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최창환 기자CWCHOI@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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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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