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6일 장중 한때 1,597원까지 폭등(원화가치 폭락)했던 원ㆍ달러 환율은 이후 8거래일 동안 188원이나 하락(원화가치 상승)했다. 올 1월 말부터 동유럽발 금융위기로 두달 넘게 하락했던 원화가치가 불과 10일도 채 안 돼 회복된 셈이다. 겉으로는 정중동(靜中動)의 자세를 취하지만 환율변화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 금융당국은 이달 들어 박스권을 유지하고 있는 환율에 한숨 돌리는 분위기다. 하지만 원화가치 폭락의 칼을 피했다고 안도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우리 외환시장을 ‘양날의 칼’이라고 말한다. 외환시장의 체력 자체가 워낙 약한데다 대외변수에 따른 변동성이 심해 투기세력들이 작정하고 덤벼든다면 폭락과 폭등의 칼날을 피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채권자들이 달라는 대로 돈 다 내주고 외환보유액을 바닥낸 뒤 IMF에 찾아가서 ‘나 이제 망했으니까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거나 환율이 끝없이 올라가도록 방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원화는 환투기 세력의 장난감=3월 중순 이후 원화가격이 안정세를 찾고 있는 것은 1,600원선을 계속 두들기던 환투기 세력들이 추가 공격에 나서기보다는 일단 차익을 실현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방향성 투자’보다는 몰아붙이기 식 거래 전략이 먹히지 않자 한발 뺀 것이다. 국내의 한 외환딜러는 “역외 투기세력들이 역외선물환(NDF) 시장을 이용해 우리 외환시장을 가지고 놀다 제풀에 지친 셈”이라고 말했다. 역외 투기세력들은 주로 해외 투자은행이나 헤지펀드들로 케이맨제도 등의 조세회피지역에 거점을 두고 뉴욕ㆍ홍콩ㆍ싱가포르 등의 NDF 시장에서 활동한다. NDF 시장은 현물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고 차액만 결제하면 되기 때문에 주식선물시장처럼 비교적 적은 돈으로도 거액의 차익을 거둘 수 있다. NDF 시장에서 달러 매수 주문을 쏟아내 원화가격을 떨어뜨린 뒤 현물시장에서 원화가격이 급락하면 고점에서 달러를 매도해 차익을 실현하는 전략이다. 김주형 LG경제연구원 원장은 “외국자본의 경우 아직 장기 투자자본보다 투기적 자본이 많다”면서 “조세회피지역을 통해 2~3단계 거치면서 들어오는 헤지펀드도 있는 듯하다”고 설명했다. ◇약한 체력에 외환유동성 의심까지=외환시장 규모가 작아 변동성이 큰 것도 환투기 세력들이 활개치는 요인이다. 경제규모가 커져 자본 이동량(유동성)은 많아졌지만 외환시장의 성장은 그에 못 미친다. 지난해 1ㆍ4분기 611억달러였던 외국환은행의 외환거래 규모는 지난해 4ㆍ4분기 441억달러 수준까지 떨어졌고 외환시장의 거래 규모도 100억달러에서 50억달러 수준에 그치고 있다. 현석원 현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현재 30억~40억달러 수준으로 거래량이 떨어지면서 원ㆍ달러 환율의 변동폭도 크다”며 “글로벌 금융불안이 안정되더라도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달러 의존도가 높다는 점과 외화유동성에 대한 의심도 외환시장의 변동성을 크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선물환ㆍ현물환ㆍ통화스와프 등은 98%가 원ㆍ달러를 사용할 정도로 달러 의존적이다. 엔화ㆍ유로화ㆍ위안화 등이 나머지 2%를 차지한다. 경상수지 흑자와 외평채 발행 성공으로 외화유동성에 대한 불신의 벽이 많이 무너졌지만 국내 외화자금들이 아직도 유동성이 묶여 있는 자산이나 비유동성자산(illiquid asset)에 투자되고 있어 즉시 현금화가 어렵다는 우려는 쉽게 수그러지지 않고 있다. ◇단속권한 없는 금융당국 속수무책=금융당국 역시 환투기 세력에 대한 문제점은 인식하고 있다. 당국이 통제할 수 없는 외국자본의 빈번한 유출로 폐해가 커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통제를 할 경우 대외신인도에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시장 원리를 유지하면서도 해외자본의 유출입에 마찰을 줄 수 있는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신 교수는 “미국도 상황이 급박하면 자본통제를 시행하고 있다”며 “한국도 디레버리징이 끝나고 투자가 돌아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선진국들에 협조를 구하고 자본통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재철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도 “우리나라는 변동환율제 국가여서 외환정책을 잘못 구사할 경우 환율 조작 의심을 받을 수 있다”며 “외환시장 변동성을 줄이기 위한 보험으로 외환보유액 확충과 단기외채 통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