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수필] 시누이 만세

鄭泰成(언론인)때리는 시어미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이다. 시어머니에게 대들 수는 없어 분한 마음을 엉뚱한 시누이에게 돌리는 수도 있다. 말리는 시늉만 할뿐 내심으로는 고소해 하기 때문에 시누이를 미워할 수도 있다. 시어머니에게 고자질한 사람, 그래서 매 맞는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시누이이기 때문에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울 수도 있다. 출가외인인 주제에 친정에 와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것이 못마땅 할 수도 있다. 시누이에게도 물론 할 말은 있다. 출가외인이며 소임은 비록 다를지언정 친정이 잘못되는 것을, 그 잘못이 올케이자 며느리때문에 저질러지는 것을 어찌 좌시 할 수 있는가라고 말할 수 있다. 시누이는 친정 어머니와 며느리를 잇는 가교이며 조정자라고 스스로 자임할 수도 있다. 올케에게는 권한 없는 감시자이며 고발자인 동시에 포악한 재판관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시누이 자신은 오로지 친정이 잘되고 며느리 노릇 잘하라는 충정의 발로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고자질한 것이 아니라 충고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 사는 이치는 참으로 묘하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시누이가 시가에 가면 며느리가 되어 그댁 시누이로부터 핍박 받는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는다. 시누이가 미워 죽겠다는 며느리도 친정에 가서는 고약한 시누이로 변한다. 나무랄 데 없이 며느리 노릇을 잘하는 시누이는 별로 많지 않다. 올케를 구박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은 모르니 시댁에서 받은 설움을 친정에 가서 푸는 꼴이다. 누구나 시누이면서 올케이니 상대만 다를뿐 공평하게 보복할 기회를 갖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시누이가 많으면 집안이 정의로울지는 모르나 매우 시끄럽게는 된다. 시누이와 올케의 관계가 꼭 여성의 경우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또 조직의 형태나 크고 작은 것을 불문하고, 심지어는 나라의 큰 일에서부터 사사로운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시누이와 올케는 도처에 깔려 있다. 누구를 시누이의 자리에, 또 누구를 올케의 자리에 대입(代入)하든 상관없다. 또 누구를 시어머니로 지목하든 상관없다. 어차피 그 자리는 돌고 도는 자리이며 동전의 앞뒤와 같기 때문이다. 시누이가 많아 잘못이 크게 불거지기 전에 시정되는 일도 물론 많다. 공연히 분란을 조장하는 일도 당연히 많다. 뭐 집히는게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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