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진시황릉에서 대만해협까지/양평 편집위원(데스크 칼럼)

어렸을적 미개한 인종들의 짓이라고 비웃었던 것들이 「선진적」이라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한 적이 한두번 아니다.아프리카의 토속음악이 재즈의 시원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가 그런 것이다. 재즈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식인종이라고 깔보던 사람들이 우리보다 한수위의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기가 죽었다. 피카소의 정신사나운 그림에 주눅들었다가 그 초현대적이라는 미술이 아프리카의 원시미술에서 이미지를 따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인도 북부지역이나 티베트등지에서 사람이 죽으면 조장이라해서 새들이 쪼아먹도록 향료를 발라 밖에 내놓는다거나 남태평양사람들이 수장이라며 물고기에게 먹도록 강이나 바다에 던진다는 말에는 증오마저 느꼈다. 그것도 달라졌다. 인간의 자연회귀라는데 눈을 뜰만큼 철이 들어서인지 「묘지전쟁」이라는 말까지 나와선지는 알수없다.아무튼 망자들이 살도록 「유택」을, 그것도 예의의 정도를 벗어나 호화주택같이 지어야한다고 법석을 떠는 우리가 고인돌시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듯 했다. 그러다보니 인도권 사람들이 싯다르타같이 해맑아 보였고 남태평양사람들도 끔찍하기보다 고갱의 그림에서처럼 천진하게 다가왔다. 오늘날 묘지전쟁이라고들 하나 그것은 싸움도 아니다. 어릴적 무서운 꿈을 꾸듯 묘지떼에 쫓기고만 있으며 그것도 날로 늘어나는 주택들의 협공을 받고 있다. 그래서 보건복지부가 최근 개인묘지는 6평, 집단묘지는 3평이내로 축소하려한 것이나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이 한국형 가족묘지를 개발한 것은 뒤늦은대로 반갑지만 그것도 근치제는 아니다. 오늘날 대도시부근의 산을 항공사진으로 찍어보면 아마 한세대전의 「기계독」에 걸린 사람들의 머리같을 것이다. 더러운 바리캉에서 생기는 이 병에 걸리면 머리털이 빠지고 부스럼이 생겼다. 우리 산들도 숲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물집같은 무덤들이 촘촘히 들어서고 있다.무덤을 줄여봤자 작은 물집이 번질뿐이기에 우리가 아프리카의 얼룩말들이 사막화에 쫓기듯 묘지화에 쫓기는 신세는 마찬가지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덤을 만들지않아야 하며 우리나라에도 인도인들의 자연회귀에 바탕을 둔 화장법이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그러나 「유택」이라는 말이 있는한 조상은 무주택자가 되고 자신은 불효자가 될수있다. 여기에 종지부를 찍을수 있는 계층은 지도층이자 부유층이다. 그들만이 효·불효의 잣대를 벗어나 장례를 선택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지도층이 오래전에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주은래 수상이 1976년 작고하자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화장해 대만해협 등에 뿌렸다. 뒤이어 모택동주석과 최근의 등소평도 같은 유언을 했다. 모택동의 경우 사체가 기념관에 보존되고 있으나 유택은 없다. 그것은 요란한 장례의 인습에 얽매인 중국의 일이기에 돋보이는 결단이었다. 중국인들은 역사이래 자신들의 묘로 허리가 휘었고 지배층의 릉으로 허리가 꺾였다. 진시황이 죽기도 전에 능을 만드는데 동원된 인부 70만명은 죽어야했고 죽은뒤에는 왕자와 공주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이 뒤따라야 했다. 그후 2천여년이 지났지만 묘지에 대한 중국인들의 집착은 사회주의혁명으로도 추방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 중국지도층은 중국의 묘지문제를 12억분의 3만큼 해결한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묘지해방을 선도한 셈이다. 그들은 살아서 산서성에서 섬서성까지 대장정을 했고 죽어서는 그 섬서성의 여산진시황능에서 대만해협까지 또 하나의 장정을 한것이다. 처음의 장정이 국민당과의 싸움이라면 두번째 장정은 인습과의 투쟁이었다. 그것은 유택이라는 빈집과 국민의 추앙을 맞바꾸어 수지맞는 거래같지만 우리의 경우 그런 사례를 보기 힘들어 부럽다. 아직 가문에 얽매이다 보니 돈을 벌면 조상묘를 고치고 권세를 잡으면 역사책을 뜯어 고치려고도 한다. 그바람에 어릴적 자신있게 외웠던 사육신의 이름마저 아리송해졌다.그러고 보면 묘지문제를 극복하는 길은 장례간소화라는 구호가 아니라 그것을 앞장서 외치는 이들의 실천이다. 그것은 주은래의 말한마디처럼 쉽기도 하고 자주국방의 구호와 지도층 자제들의 현역복무율을 일치시키기 만큼 어렵다. 결국 묘지문제는 역사의 성숙만이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는 자유의 발전과정』이라던 헤겔이 우리 사회에 살고있다면 같은 말이라도 『역사는 무덤의 퇴화과정』이라고 했을성 싶다. 인류가 원시종교로부터도, 전제자의 폭압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의 피라미드와 순장릉들은 오래전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 호화묘지는 있고 보통사람들도 유택이라는 원시종교의 마지막 잔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는 아니다. 인류가 모두 겪는 일이나 한반도 인구 7천만이라는 이승의 형편때문에 한결 다급하게 와닿는 명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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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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