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부드러운 카리스마, 구옥희




[서울경제 골프매거진] 구옥희에게는 언제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한국여자프로골프 1세대, 한국인 최초의 일본 JLPGA 투어 진출, 미국 LPGA 투어 경기에서 우승한 최초의 한국선수, KLPGA 명예의 전당 1호로 헌액. 그리고 ‘최고’라는 말도 빠지지 않는다. 통산 20승으로 국내 최다승, 7회의 최다 연속 우승, KLPGA 투어 유일의 한 시즌 전경기 석권, 그리고 45세에 기록한 국내 최고령 우승까지 기록은 헤아릴 수 없다. 30년 전 골프 불모지에서 세계무대를 꿈꿨던 겁 없는 18세 소녀에서 이제 백전노장으로 돌아온 그가 필드에서의 카리스마를 벗고 골프라는 운명과의 만남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1978년 프로에 데뷔해 올해로 꼭 30년이 되었다. 강산이 세 번은 바뀌었을 세월 동안 늘 그 자리를 지켜온 비결은 무엇인가. 30년 투어생활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외국에서도 30년 가까이 뛴 여자선수는 없는 것으로 안다. 원동력은 내가 쌓아온 골프에 대한 노하우가 아닐까. 힘으로 했다면 하지 못했을 골프를 나는 간단하게 하려고 노력했고 쉬운 골프를 추구했다. 미국에 갔을 때는 대부분의 골퍼들이 오버스윙을 구사했는데 나는 동작을 최소화해서 콤팩트한 스윙을 구축했다. 힘을 임팩트에만 집중해서 샷을 날린 것이다. 세계에서 나밖에 할 수 없는 기술이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선지 LPGA 투어의 대표적인 스윙으로 미국 골프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캐디생활을 하다 골프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은 골프선수가 되기 위해 18세에 캐디 일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나에게는 골프선수가 되어 해외로 진출해야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당시 골프는 특별한 운동이었고 여성 골프인구는 우리나라에서 100명도 안됐을 때였다. 하지만 일본을 늘 염두에 두고 사람들을 통해 정보를 구했고 신문이나 잡지에 골프 관련 내용이 나오면 관심 있게 봤다. 골프는 어떻게 배웠나. 기초적인 것은 연습장에서 좀 배웠지만 어느 정도 익힌 후에는 독학으로 터득했다. 과거에 많이 소개된 밥 토스키나 잭 니클로스의 교습서를 읽어보고 ‘아, 이렇게 하면 스피드를 높일 수 있구나’, ‘이렇게 하면 파워가 커지는구나’하며 하나하나씩 알아갔다. 독학으로 익히고 훈련해서 프로테스트를 단번에 통과했다니 놀랍다. 골프에 입문한 지 3년 만에 프로테스트가 열렸다. 그 때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은 나까지 4명이었는데 모두들 실력이 좋았다. 처음 일본에 가서는 힘든 점이 많았을 텐데. 일단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답답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적응하게 되었다.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어디서나 이룰 수 있다. 나에게는 내 골프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 투어에 적응해도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는 것은 쉽지 않았을 듯하다. 일본투어에 혼자 남은 후 후배들이 뒤따라와 같이 투어활동을 했다. 그래도 외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한국에서 가까운 곳이었으니 시즌이 끝나면 한국에서 한두 달 머물렀지만 일본으로 가면 다시 외로운 생활이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무엇 때문에 사나, 왜 사나’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럴 때면 공원을 산책하거나 달리면서 마음을 달랬다. 투어 생활을 오래 해오면서 2002년 국내 최연장 우승도 기록했다. 일본에서는 어떤가. 3년 후인 2004년 일본에서 우승했는데 48세였지만 일본의 최연장 우승 기록을 깨지는 못했다. 일본에는 만 50세에 우승을 기록한 선수가 있다. 한국 여자선수 최초로 일본으로 건너가 23승을 기록했다. 스스로는 어떻게 평가하나.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잘한 것 같지 않은데 그런 기록을 돌아보면 스스로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쇼트게임이 좋았으면 미국에서 더 잘했을 것 같으니 사람에게 만족이란 건 없는 것 같다. 미국으로 건너간 계기는 무엇이었나. 일본으로 진출하기 전에도 주변에서 ‘미국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행에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일본이야 가깝고 같은 동양이지만 미국은 전혀 다른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지금의 미즈노오픈처럼 LPGA 투어 경기를 겸해서 열리는 대회에서서 3위에 오르면서 미국 진출을 생각하게 됐다. 투어 3년차였던 그때 미국 선수들이 출전한 경기에서 상위권에 오르자 미국에서도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세계적인 투어의 톱클래스 틈에서 좋은 성적이 나니 자신감이 솟았다. 한국 미국 일본 3개 투어에서 모두 우승을 기록한 선수는 본인이 최초다. LPGA 투어에서 거둔 우승 순간은 어땠나. 18번홀에서 두 번째 샷이 그린을 넘어가서 어프로치를 해야 했다. 어프로치 지점으로 가보니 그린 근처에 앉아있던 갤러리가 볼을 피해 이동하면서 잔디가 눌린 발자국 속에 볼이 들어가 있었다.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너무 잘 하려고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톱볼 비슷하게 날린 샷이 홀에서 3~4m 정도 거리에 떨어졌고, 쉬운 퍼트가 아니었지만 집중하면서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우승으로 인해 이후 더 많은 우승 기회를 맞았을 것 같다. 그 우승은 정말 특별했다. 내가 결국은 해냈고 계속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 하지만 우승 기회는 그 전에도 있었고 그 후로도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 퍼팅 때문에 우승으로 연결 짓지 못했다. 쇼트게임에서 유난히 취약했던 이유는. 퍼트는 몸의 기가 많이 작용하는 기술이다. 배짱이 좋고 몸에 힘이 많아야 하는데 나에게는 힘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게 가장 큰 단점이었다. 샷은 율동으로 하지만 퍼트는 율동이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힘이 가장 필요한 게 퍼팅이다. 그렇다면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은. 샷은 대체로 자신 있었다. 정확도가 높은 편이고 샷거리도 230~240야드 정도 간다. 미국행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미국에 가서 얻은 게 많다. 일본으로 돌아와 다시 우승하면서 미국 투어 경험이 발전의 계기가 됐다고 생각했다. 미국으로 가서 또 다른 골프 세계를 본 것은 행운이었다. 개인적인 면에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큰 시야를 갖게 됐고, 많은 것을 포용할 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를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됐다. 참선을 통해 투어생활을 이어올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종교를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 미국으로 진출한 후 1988년 무렵부터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불교를 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다. 투어생활을 시작할 무렵 부산에서 전지훈련을 할 때였다. 나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인내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어서 절에서 7일 기도를 했다. 잠도 자지 않고 7일 동안 기도를 하면서 자신에 대한 믿음과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것은 골프에서도 큰 힘이 됐다. 해외 전지훈련이 일반화되어 부산에서 동계훈련을 했다는 말이 신기하게 들린다. 당시에는 외국에 나갈 수 없었다. 겨울에 한 달 정도 부산이나 제주도에 머물며 훈련을 하는 정도였다. 제주도는 한두 번 갔는데 눈이 많이 오니 연습하기 힘들어서 부산을 주로 갔다. 지금도 부산은 겨울 시즌에 최고의 골프환경을 제공한다. 부산에서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나. 당시에는 동래와 부산 골프장밖에 없어서 그곳에서 많이 플레이했다. 라운드를 하지 않을 때는 해운대 백사장에서 뛰고, 숙소로 이용한 온천장 뒷산을 올랐다. 가끔 후배와 바닷가에서 꼼장어 구워 소주 먹던 생각, 자갈치 시장에 가서 회 먹었던 생각도 난다. 해외에서 활동하면서도 그때 생각이 나곤 해서 가끔은 부산을 찾았다. 그때 그 장소들을 다시 가보고 ‘옛날에 내가 있었던 곳이구나’ 생각하곤 했다. 한 번은 아마추어 친구들과 골프를 하러 부산에 내려간 적도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어느덧 7, 8년이 지났다. 한 시즌 전 대회를 석권하기도 했고, 2위와 20타차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동료들보다 앞서간 비결은 무엇인가. 실력을 키워준 건 연습이었다. 그때는 하루 종일 연습에만 매달렸고 늘 시간이 아까웠다. 집에서 연습장까지 버스로 한 시간이 걸리는데 그 시간이 아까워서 택시를 탄 적도 많았다. 연습생 시절에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그래도 빨리 가서 연습하고 싶은 욕심에 택시를 탔다. 돈보다 시간이 아까웠던 것이다. 경기 때 모습은 상당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는데 실제 모습은 온화해 보인다. 내성적이면서 외향적인 성격을 다 갖고 있다. 어렸을 때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낼 때도 많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외향적으로 바뀌고 말도 늘었다. 차분한 면도 있지만 대담한 면도 있다. 플레이할 때도 그런 성격이 드러나는가. 안정적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한 번 질러봐야겠다고 생각하면 대범해진다. 과감할 땐 과감하고 신중할 땐 신중하다. 한국여자골프협회가 2006년 신설한 ‘명예의 전당’에 1호로 이름을 올렸다. 선수로서 최고의 명예를 인정받은 소감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어서 기쁘다. 투어에 입문해 30여년 동안 골프를 해왔다. 골프를 하게 된 것이 마치 운명인 것처럼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떠나지 못했다. 불모지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오면서 노력한 보람을 느낀다. 귀국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는데. 이번에 추석 전에 와서 꽤 오래 머물렀는데 다시 일본으로 가면 일본 생활을 마무리할 생각이다.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현역에서 은퇴하는 것도 생각 중이다. 은퇴 후 계획하는 것이 있다면. 골프계에 남아 선배로서 남은 몫을 하고 싶다. 스무 해 넘게 나가 있었기 때문에 기회가 되는 대로 협회를 위해 일하겠다. 실내연습장을 운영하며 후배를 지도, 내가 못 다 이룬 것을 그들을 통해 이루고 싶다. 감기몸살로 기권하기는 했지만 이번에 후배들과 같이 경기한 소감은 어땠나. 밖에서도 많이 보고 듣는데 우리나라 골프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이 발전한 것 같다. 그런 한국골프의 성장에 조금이라도 발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하고, 1세대 선수로 그만큼 일군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과거의 자신처럼 국내에 더 이상 적수가 없는 신지애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후배들이 노력하고 활약하는 것을 보면서 선배로서 대견스러운 마음뿐이다. 하지만 성적이 안 나더라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슬럼프도 겪게 되고 계속 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골프 선수로 활동하며 30년을 보냈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거란 생각도 들지만 결혼을 하고 싶지는 않았나. 미국에서 머물던 서른 중반일 때나 5~6년 전 일본에서 결혼을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보면 서로의 생각의 차이를 알게 되고 결혼을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다. 골프를 계속하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은퇴를 고려하는 시점에서는 어떤가. 최근 들어 결혼에 대한 생각이 더 커졌다. 과거에는 나름대로 하는 게 있었으니 꼭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제2의 인생을 반 살았으니까 새로운 것도 시도해보고 싶다.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난다면 생각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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