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차기 정부, 이것만은 고치자] 금융업계, 정치논리에 골병 든다


지난달 한 대형 증권사는 인가신청을 낼 예정이었던 싱가포르 현지법인 설립을 돌연 취소했다. 지난해 대형 투자은행(IB)으로 전환하기 위해 수천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단행할 때까지만 해도 해외시장 공략을 위해 적극 추진했던 사안이지만 IB 전환을 위한 법안 마련이 늦어지고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까지 겹치면서 수익부진 우려가 커지자 사업을 접은 것이다.

국내 금융투자업계가 만연한 정치논리에 골병이 들고 있다. 대형 IB로 도약하기 위해 대규모 증자를 했지만 관련 법이 통과되지 않아 제대로 프라임브로커(PB)와 자기자본투자(PI) 등 신규사업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됐고 이에 따라 해외 IB시장에 대한 공략에 나서겠다고 했던 당초 계획도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국내에서도 정치논리가 득세하면서 시장이 활성화되기는커녕 파생상품 거래세 부과 등 각종 규제에 막혀 오히려 뒷걸음질하고 있는 상황이다.


1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국내 증권사의 대형 IB 전환을 추진하기 위해 금융위원회가 지난 5월 입법 예고했던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150여일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통과 여부가 불투명하다. 당시 금융당국은 조속한 시행을 위해 유예기간을 기존 6개월에서 3개월로 줄이고 법안수정 과정도 생략한 채 19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아직 제대로 된 논의조차 거치지 않은 상태다.

실제로 이 개정안은 첫 관문인 국회 정무위원회 정책소위원회에도 올라가지 못했다. 혹여 가까운 시일 내에 정책소위원회를 통과하더라도 이후 상임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 등을 거쳐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는 데만 2~3개월가량이 소요될 수 있고 또 이 기간 국정감사와 대선 등 굵직한 사안이 산재해 있어 “연내 자본시장법 통과가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게 시장의 일반적 평가다.


금융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연내 통과의 가장 큰 걸림돌 가운데 하나는 시간”이라며 “이달 국정감사에 이어 다음달부터는 정치권이 본격 대선 모드로 돌아선다는 측면에서 자본시장법 개정안 통과가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고 지적했다. 금융위원회의 한 고위관계자도 “국회 일정을 고려해 여러 의원과 접촉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시일상 통과 여부는 속단하기 어렵다”며 “국정감사와 대선 등을 제외하고 정책소위원회나 상임위원회 등이 열릴 수 있는 시간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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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대형 IB로 전환하기 위해 이미 대규모 자본확충을 했던 증권사들은 늘어난 자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애만 태우는 실정이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KDB대우증권(1조1,200억원)을 비롯해 우리투자증권(6,300억원), 삼성증권(4,000억원), 한국투자증권(7,300억원), 현대증권(5,600억원) 등은 대형 IB 요건인 자기자본 3조원을 맞추고자 지난해 대거 목돈을 마련한 바 있다.

한 국내 IB업계 고위관계자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의 주요 골자 가운데 하나는 PI”라며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표류하고 있어 국내 금융투자업체들은 충분한 실탄을 가지고도 투자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글로벌 IB시장 진출을 위해서는 딜(deal)을 성사시킨 레코드(record)가 있어야 한다”며 “자본시장법 개정안 통과가 미뤄지며 그나마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국내에서조차 그 기회를 잃게 돼 해외 IB시장 진출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파생상품거래세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금융투자업계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금융투자업계는 그렇지 않아도 유럽 재정위기 우려 등으로 국내 증시가 제자리걸음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거래세마저 부과할 경우 투자자 이탈에 따른 수익악화로 시장기반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선물옵션 예탁금 1,500만원 부과에 이어 옵션 승수를 10만원에서 50만원으로 올리면서 옵션 거래대금 규모가 지난해 8월과 비교해 50%가량 쪼그라들었다”며 “이미 여러 차례 파생상품 규제로 관련 규모가 줄어든 상황에서 거래세까지 매기면 시장이 오히려 뒷걸음질치는 결과만 초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안현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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