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임금체불사회, 탈출구는 없나] <1> 악덕 사업주에 근로자만 발동동

고의 부도 후 먹튀 많아… 근로자 생활고에 가족해체 위기까지<br>"실컷 이용해먹고" 배신감에 속병<br>근로 사실 입증자료등 부실할땐 되레 사기범 누명 덮어씌우기도<br>노무관리 취약한 사업장서 빈발<br>체임 청산제도 적극 활용 위한 사업주·근로자 의식전환 필요

고용노동부 경기지청의 한 근로감독관(오른쪽)이 지난 2일 체임이 발생한 경기도 화성의 모 사업장을 지도 방문해 체임 진정서를 낸 근로자들로부터 상황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고용노동부


"추석인데 제사상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의 생활비가 없습니다." "아내에게 월급을 받지 못했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고물가로 서민생활이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는 가운데 급여를 받지 못한 근로자들의 한숨이 추석이 다가올수록 깊어지고 있다. 최근 사장이 고의로 부도를 내고 중국으로 달아난 서울 을지로 A사의 직원 최모(56)씨는 4일 "체불임금으로 인해 없던 병까지 생겼다"고 토로했다. 당장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악덕 업주에게 이용만 당했다는 생각에 울화통이 치밀어 결국 병원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회사는 페인트 도장 사업을 주로 해 근로자들은 대부분 일용직이다. 따라서 최씨처럼 하루 벌어 생활하는 이들에게 발생한 체임은 생활고를 넘어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각종 질병까지 유발하고 있다. 총 1억2,000만원의 급여를 받을 길이 막연해진 최씨와 10명의 근로자들은 현재 3차례로 나눠 체당금(회사가 도산해 근로자들이 임금이나 퇴직금을 받지 못할 경우 정부가 사업주를 대신해 일정 한도 내에서 우선적으로 지급해주는 돈)을 신청한 상태다. 이 회사의 다른 근로자는 "체임에 따른 생활고로 아내와 이혼한 뒤 자녀들을 친척집에 맡기고 홀로 생활한다"며 "일당을 받아 우선은 생활비로 사용한 카드 빚을 조금씩 갚아가고 있지만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됐는지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울먹였다. 무책임한 사업주의 행태로 발생한 체임이 가족의 해체까지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체임 해소 지도에 나서고 있는 근로감독관들은 비교적 규모가 큰 사업장보다는 영세 사업장에서 체임이 많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체계적인 노무관리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 정동의 작은 부동산 관리업체에서 일한 김모(50)씨는 350만원의 급여를 받지 못했다고 고용노동청에 진정서를 냈다가 오히려 '꽃뱀'으로 몰리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사장인 박모(60)씨가 김씨를 꽃뱀으로 몰아세워 오히려 자신에게 사기를 치려 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특히 사장과 단 둘이 사무실에서 일을 한 김씨는 급여를 받기 위해 자신이 근무한 사실부터 입증해야 하는 난관에 부딪쳤다. 근무사실을 입증할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동료가 없는 관계로 근무 사실을 증언할 이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장은 동료 사업가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씨가 꽃뱀이라는 증거를 대며 급여를 줄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해당 사건을 담당한 근로감독관은 "정황상 진정인이 근무한 것은 맞는데 이를 입증할 자료가 없어 사건을 무혐의 종결 처리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상습적으로 급여와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고 위장폐업 후 체당금 부정수급을 기도한 사업주도 있다. 지난 8월 전남 영암군 대불공단의 선박블록제조업체 B사 사장 김모(38)씨는 근로자 64명의 급여 및 퇴직금 1억6,000만여원을 체당금으로 대신 해결하기 위해 위장폐업을 한 혐의로 구속됐다. 김씨는 위장폐업을 통해 근로자 급여를 6개월간이나 고의로 체불했다. 특히 김씨는 친인척 명의의 별도 법인을 설립하고 상호변경을 통해 동일한 사업을 계속하면서 사업체가 마치 폐업한 것처럼 허위 진술을 하고 거짓 서류를 제출했다가 적발됐다. 해당 사건을 조사한 근로감독관은 "하마터면 국가자산인 체당금이 부정한 방법으로 지급될 뻔했다"며 "끈질긴 수사로 폐업경위와 위장폐업 혐의를 밝혀내 구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아르바이트 체임은 구제가 더욱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일단 정식으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금액이 소액이며 감정싸움 양상으로 진행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사업주 횡포에 대한 대처 방법을 잘 모르는 청소년 근로자라면 더더욱 체임 해소가 어렵다는 게 근로감독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물론 체임 청산 의지가 강한 사업자와 체임청산제도를 적절히 활용한 근로자들도 있다. 서울 중구 남산동의 실내 인테리어 사업체 C사는 올해 초 일시적 경영난으로 무려 42억원의 급여와 퇴직금을 350명의 근로자들에게 지불하지 못했다. C사는 이후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밟아가고 있으며 250명의 근로자들은 체당금 신청을 통해 20억원의 밀린 급여를 받았다. 회사가 재판상의 파산선고를 받거나 회생절차개시 결정을 받게 되더라도 체당금 신청과 지급이 가능하다는 점을 적절히 활용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회사 역시 강한 청산 의지를 갖고 법원 판단을 전제로 자산을 처분해 급여와 퇴직금 중 일부인 3억원을 7월 집행했다. 박두하 고용노동부 서울지방고용노동청 근로개선1과 과장은 "추석 명절을 앞두고 대대적인 지도 활동을 펴고 있으나 악덕 사업주들이 의도적으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체임을 하게 되면 해소가 쉽지 않다"며 "체임을 해소하기 위한 사업주의 청산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근로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권태성 고용부 근로개선정책과장은 "근로자의 임금지급을 고의로 회피하거나 국고자산을 통해 체임을 청산하려는 악덕 사업주에 대해 정부는 노동시장의 공정질서 확립을 위해 엄정 대처해나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반대로 근로자가 체임 진정을 이용해 사업주로부터 돈을 뜯어내는 사례도 없지는 않다. 영세 사업장의 경우 사업주가 관련 법령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악용해 근로자들이 체임금액과 퇴직금을 부풀려 받아내는 일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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