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제품을 생산하는 A대기업 경영기획실의 모 임원은 최근 고유가 지속에 따라 고효율 에너지설비 도입을 검토하다 포기했다. 대신 남는 자금을 중국ㆍ동남아 등 해외 현지시장의 마케팅 확대에 투입하기로 했다.
회사와 이름 등을 익명으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한 그는 “원재료 값을 제외하면 우리 회사 에너지비용이 전체 원가의 3%가 채 안된다” 며 “같은 투자비를 마케팅 확장에 쓰면 당장 매출 증대율이 3%가량 될 것으로 추정된다”고 털어놓았다.
국제유가는 천정부지로 뛰고 있는데 국내 에너지 다소비 기업들의 부가가치 창출을 위한 에너지 절감노력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유가 급등세가 최근 2~3년 사이 이상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정부의 대책은 평시와 별 다를 바 없는 데서 공통적으로 그 원인을 찾았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에너지 다소비 기업이 국내 최종 에너지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40%. 따라서 이들 기업이 10%만 에너지 소비를 줄여도 이는 국내 전 차량이 요일제에 참여, 절약할 수 있는 에너지량의 10배를 훨씬 웃돈다. 산자부의 한 관계자는 “산업 부문에서 에너지 다소비 기업의 절약을 적극 유도하는 것이 수송ㆍ상업 분야 등의 절약대책보다 훨씬 효과적”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정부가 에너지 다소비 기업의 에너지 절약을 유도하는 인센티브는 재원부족으로 정책 툴(Tool)로서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 대책의 양 축인 자금지원과 세제혜택을 살펴보면 기업들이 왜 에너지 절감에 나서지 않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에너지절약시설에 투자하는 기업에 저리의 자금을 융자해주는 예산은 올해 4,692억원. 지난해 4,580억원에 비해 112억원 늘어 증가율은 2% 정도에 불과하다.
또 에너지절약시설 투자 세액공제율은 기업들의 요구로 지난해부터 7%에서 10%로 늘었지만 이 역시 ‘2007년까지’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다. 철강업계의 한 관계자는 “에너지시설 투자에 대한 정부의 인센티브는 타 투자에 비해 특별한 것이 없거나 오히려 부족한 형편이어서 매력이 별로 없다”고 지적했다.
조세연구원 관계자는 “휘발유ㆍ경유 등에서 걷는 교통세가 현재는 도로ㆍ철도 등 교통시설 확충에 주로 이용돼 오히려 수송연료 소비를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 며 “향후 교통세의 상당 부분을 에너지절감대책에 투입해 에너지 절감 인센티브를 획기적으로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저가의 산업용 에너지요금정책을 기약 없이 유지해온 것이나 국내 기업이 정부의 환경규제를 낮게 평가하고 있는 것도 정부의 실책 중 하나로 꼽힌다. 국내 산업용 가스 및 전기요금은 일본ㆍ독일 등 선진국이나 경쟁국인 대만에 비해서도 상당히 낮다. 세계경제포럼 조사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환경규제에 대한 인식 정도도 평균 30위권 중반에 머물고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외국인 주주 등의 배당압력이 높아져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단기적 수익극대화에 치중하는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다” 면서 “이런 상황에서 에너지 절약으로 인한 비용 절감효과가 작다 보니 절약시설 투자는 자연스럽게 뒤로 밀리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