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김재영의 남성학] 피임약

여성 억눌렸던 性 적극표현 계기로

‘주문쇄도 70판 발매. 실제적 피임법. 구하지 않는 아해의 중하(重荷)에 고(苦)하는 인(人)에게 고함.’ 1924년 3월 매일신보에 실린 이 책 광고는 피임과 불임, 인공 유산법에 대해 상세히 쓴 책으로 70판을 찍어 낼 정도로 대단한 베스트셀러 였다. 사회적으로 금하는 피임과 유산에 대한 책이 버젓이 광고를 할 정도라면 당시의 사회상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그 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아마도 성지식은 부족하고 달리 여가가 없어 원치 않는 임신이 많고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여 낙태가 흔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지금은 여고생들조차 낙태계를 조직하고 낙태 수술을 잠깐 헌혈하는 정도로 여기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생활고나 혼외정사로 원치 않게 임신을 한 경우 서민들은 통상 장승코에 낙태를 기원했다. 그래서 ‘낙태약 된다고 저 장승코를 어젯밤 비온 뒤에 또 긁어갔소. 오목조목 들어간 고무신자국. 키 작은 여자가 발버둥쳤소(중략).’ 이런 노래를 남몰래 부르는 여인들이 많았다. 장승의 코가 신통력을 발휘해서 외간 남자의 코(성기를 상징)로 인해 생긴 문제를 해결한다고 믿었다. 60년대부터 일반화된 피임약은 여성 해방 운동과 맞물려 성의 역사를 뒤바꿔 놓은 획기적인 발명이다. 그전까지 섹스는 곧 임신, 따라서 임신을 위한 섹스 이외는 것은 모두 부정이며 음란한 것으로 치부했던 여성들이 감추고 억눌렀던 성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원치 않는 임신의 공포에서 벗어난 여성들은 산업의 발달과 함께 사회활동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자유연애와 프리섹스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이러한 변화가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아무튼 ‘피임약’은 성을 보다 건강한 것으로, 그리고 즐기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만큼 피임약의 출현은 사회관습과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됐다. 다만 이에 반해 모든 것을 남성 우월주의에 빠져 있던 남자들은 시련기에 접어 들었다고 볼 수 있다. 날로 대담해지는 여성에 비해 스트레스와 질병으로 남성은 날로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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