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파산보호를 신청한 미국 20위 은행인 CIT그룹은 한국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 중소상공인에게는 매우 친숙한 은행이다. 대형 은행들이 기피하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대출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며 거래처만도 100만곳에 이른다. 개인사업을 하는 재미교포들 상당수가 CIT그룹을 통해 자금을 공급받고 있다. CIT그룹은 매출 채권을 담보로 자금을 융통해주는 이른바 '팩토링'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일자리의 65%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의 생명 줄이기에 '망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too important to fail)'은행인 셈이다.
법정관리를 택한 CIT그룹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운이 없는' 은행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빚을 더 내거나 AIG처럼 부실 규모가 컸다면 미국 정부가 끝까지 책임지고 구명줄을 내려줬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3월 시스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대형은행을 대상으로 스트레스 테스트를 실시하고 공적 자금 추가투입 여부를 가렸다. 망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이른바 '대마불사(too big to fail)'원칙이 적용된 대형은행은 자산 규모 1,000억달러 이상인 19곳이 선정됐는데 자산 규모 750억달러로 20위인 CIT그룹은 그만 커트라인에 걸려 탈락한 것이다. 미 정부는 대마(大馬)가 아니라는 이유로 7월 채권 보증을 서달라는 CIT의 요청을 거절했다.
20위에게는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방지가, 19위까지는 대마불사 원칙이 적용되는 것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오바마 대통령이 중소기업 육성의지를 밝힌 지 3일 만에 CIT의 파산보호 신청은 위기를 벗어난 '대마'들의 연말 보너스 잔치와 오버랩되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하고 있다. 지방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민주당 소속의 존 코자인 뉴저지 주지사는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CEO) 출신이라는 점이 악재로 작용해 민주당 텃밭임에도 당선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에 몰리고 있다.
101년 역사의 CIT그룹은 본업에서 벗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손을 댄 것이 위기를 부른 화근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인 사이에는 월가 위기의 희생양이라는 동정론이 일고 있다. 금융위기가 부른 경기침체로 대출 손실이 더 커졌고 AIG와 씨티그룹처럼 파생상품의 부실이 더 많았다면 법정관리는 모면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어쩌면 정부로부터 채권 보증을 받고 저금리에 자금을 빌릴 수 있는 '대마'와 그렇지 않은 은행 간 게임의 룰은 처음부터 공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연말 사상 최대 보너스 잔치를 예고한 골드만삭스가 20억달러의 크레디트 라인을 열어주기로 한 약속은 장사 속만은 아닐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