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흔들리는 한국 기초과학


50여년 전 레이저가 발명되던 시기에는 그 기술이 쓸모없다고 폄하되기도 했고 어떻게 이용될 수 있을지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 지적 호기심에서 시작한 기초과학이 삶의 모습을 바꾸고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예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기초과학은 역사가 짧다. 유럽은 차치하고 일본만 하더라도 이학연구소가 1917년 설립됐다. 반면 한국의 기초연구는 1970년대 후반에야 시작됐고 본격적으로 정착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그것도 초기에는 산업화를 위해 응용연구를 지원하는 수준으로만 인식됐다. 그 후 짧은 기간 동안 우리 기초과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초과학은 선진국 수준에 못 미친다.


경제논리에 창의적 연구 외면

다행인 것은 국내 연구비 규모가 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를 포함해 지난 수년간 기초연구를 포함한 연구개발 예산수준이 증가해 현재 국내총생산(GDP) 대비 5%대로 높은 수준이다. 이 시점에 중요한 것은 과연 기초연구가 미래 성장동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기초연구 육성을 위해서는 독자적으로 시작된 창의적인 연구사업을 발굴해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현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소위 편한 길이 있기 때문이다. 유행하는 분야에서 외국에서 연구하던 경험과 실적을 이용하면 연구비를 타는 데 유리하다. 기여한 바 없는 외국연구자를 저자로 두고 논문을 게재하려는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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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유행하는 연구테마로 팀 과제 형태로 많은 연구비가 지원되다 보니 고위험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 연구는 어렵다. 또 기초과학을 전공할 젊은 학생들의 수가 적다. 좋아하는 연구를 하겠다는 자긍심을 가진 학생들도 졸업할 시기가 되면 진로를 바꾼다. 선배들이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좋은 직장이 없다. 대학교수나 정부출연연구소 전임 연구직이 돼도 연구에만 매진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기초과학은 공학과는 달리 승자를 만드는 학문이 아니다. 독립성과 다양성이 보장되는 환경에서 창의적인 새로운 문제를 만드는 학문이다. 전자ㆍ조선ㆍ자동차와 같은 공학 분야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고 있지만 선택과 집중으로 1등을 추격하는 방식이 기초과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거라는 오만을 경계해야 한다. 연구비를 많이 투입한다며 실적으로 압박한다고 창의적인 연구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연구자들이 독립적으로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과 새로운 개념을 제안하고 구현할 수 있도록 연구를 평가하는 풍토가 필요하다.

일자리 등 자긍심 주는 대책 마련을

연구개발비 전체 규모는 크지만 개인 연구자가 지원할 수 있는 과제는 많지 않다. 독자적으로 시도하려는 '도약연구'수준의 연구과제 규모를 늘리는 것이 기초과학의 경쟁력이나 다양성 측면에서 유리할 것이다. 그리고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일자리가 훨씬 더 늘어나야 한다. 기초연구자들이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안정된 일자리는 정부가 만들지 않으면 없다.

한국 기초과학의 미래는 위태하다. 유럽 강소국 스위스처럼 세계를 선도하는 독자적인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중국처럼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신흥국에 언제 따라 잡힐지 모른다.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시작된 혁신적 연구를 하려는 연구자가 연구비 걱정 없이, 독립적이고 다양한 연구에 매진할 수 있어야 한다. 당장 '노벨상'논리로 기초과학 투자를 설득하는 것이 쉬운 길일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가는 길은 노벨상 수상 여부에 관계없이 쓸모없어 보일 수 있는 기초과학이 사회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과 관심을 주는 것일 것이다. 전자기학이나 레이저와 같이 수십년 뒤 파급효과가 큰 기초과학 연구성과가 국내에서 나오게 하려면 지금 시스템은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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