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2월1일] 박영복 사기 사건


1974년 2월1일, 대검 특수부가 박영복 금록통상 대표(당시 39세)를 몰래 잡아들였다. 혐의는 부정대출. 서류를 위조해 남의 땅을 담보로 제공, 부정대출을 받았다는 것이다. 규모는 5억원. 당시로서는 큰 금액이었다. 라면 한 봉지에 20원, 신반포 차관아파트 32평형 분양가격이 최고 385만원이었던 시절이니까. 검찰이 쉬쉬하던 사건은 일주일 뒤 중소기업은행장이 박씨에게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최종적으로 확정 발표된 부정대출 금액은 모두 74억원. 당시 12개 시중은행과 국책은행 중 4개 은행을 제외한 나머지 은행들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됐다. 최초의 대형 금융사기를 일으킨 박씨는 대학 졸업 후 외항선을 탔던 선원 출신. 무허가 벌목업으로 사업을 시작한 뒤 유령건설회사를 만들어 관급공사를 따내려다 1967년 사기혐의로 구속된 전력도 있었다. 변변한 사업경력도 없고 신용조회에서도 걸렸던 박씨가 거액을 대출 받을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박씨는 우선 홍콩은행에서 발급 받은 조건부 신용장을 정상적인 신용장처럼 꾸며 은행돈을 끌어당겼다. 은행들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A은행에서 빌린 돈을 B은행의 돈을 대출 받아 갚는 식으로 이자를 꼬박꼬박 납부하는데다 중앙정보부 직원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권 정치인의 관련설도 흘러다녔다. 징역 10년을 선고 받은 뒤 3년 만에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박씨는 비슷한 수법의 사기를 계속하다 세 차례나 감옥을 들락거리며 22년을 옥중에서 보낸 끝에 2007년 7월 폐암으로 숨졌다. 박영복 사건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3공과 5ㆍ6공 내내 권력형 금융비리가 연달아 터졌다. 은행들이 무너지고 국민 부담이 늘어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뿌리 깊은 비리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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