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더블 클릭] 미군 PX


동두천으로 가던 미군 열차가 갑자기 멈춰섰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9명이 산소용접기로 문을 따낸 순간 미군이 총격을 퍼부었다. 1957년 4월 발생한 미군열차 습격 사건의 범인은 좌익 빨치산이 아니라 한국 민간인. PX용 양담배 24상자를 빼내려다 총에 맞아 한 명이 죽고 두 명이 다쳤다. 목숨과 맞바꿀 만큼 미군 PX 물자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술과 담배에서 화장품·식품류·카메라를 절도하는 사건은 오랜 세월 동안 끊이지 않았다.


△큰 가방에 '양키 물품'을 가득 담은 '미제(美製) 아줌마'가 나타나면 골목이 술렁거렸다. 화장품에서 과자, 통조림과 치즈, 커피와 면도크림까지 별천지가 열렸으니까. 미제 아줌마가 단속을 피해 잠적이라도 하면 불만이 터져나왔다. 음악을 좋아하는 까까머리 중고생들의 로망이었던 원판 음반도 대부분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장물이었다. 미군 헌병대에 배속된 한국군 카투사들이 영내 출입 민간차량의 검문을 강화하면 으레 뭔가가 뒤로 들어왔다.

관련기사



△미군이 PX를 운영하기 시작한 시기는 1895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군을 따라다닌 PX는 미국 소비문화를 전세계에 퍼뜨렸다. 한국에서 미군 PX의 위세는 유달리 당당했다. 미군정청은 1946년 한국에서 가장 번듯한 건물로 꼽히던 명동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 수용령을 내렸다. PX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국민화가 박수근이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고 소설가 박완서가 경리로 취직해 가족을 먹여살린 곳도 미군 PX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서도 땅굴까지 파서 미군의 PX를 털던 수요가 국산의 품질이 좋아지며 사라지는 듯했건만 다시 고개 들고 있단다. 면세여서 가격이 싸기 때문이라는데 명백한 불법이다. 밀수행위 방조에 해당된다. 1990년대 초반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인들은 미제 사용을 신분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짙다'고 꼬집은 적이 있다. 거꾸로 돈이 없기에 양키물품을 사는 시대에 격세지감이 들지만 씁쓸하다. 불황의 단면이기에. /권홍우 논설실장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