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6월15일] 마그나 카르타

1215년 6월15일 영국 러니메드 초원. 국왕과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이 만났다. 수세에 몰린 국왕 존은 63개 조의 문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의회민주주의의 시발점이라는 ‘대헌장(Magna Carta)’이 탄생한 순간이다. 귀족들의 충성 거부 이유는 중과세. 사자왕 리처드의 동생인 존은 왕위 계승권자인 조카를 죽이고 즉위한 이래 세금을 짜내 불만을 샀다. 즉위 첫해 1199년 2만7,000파운드였던 세금이 1211년에는 14만5,000파운드로 5배 이상 올랐다. 불만이 터진 것은 1215년 5월. 프랑스와의 전쟁자금을 마련한다며 세금을 올리고 귀족의 토지를 빼앗자 반란이 발생했다. 반란군의 일방적 우세 속에 대헌장이 마련됐지만 국왕은 준수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국면전환을 위한 시간벌기용. 로마 교황도 국왕 편을 들었다. 63개 조문 발표 두 달 만에 교황은 ‘국왕의 서명은 무효이며 러니메드의 합의를 주장하는 자는 교회에서 축출, 파문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개혁을 원치 않았던 교회의 제동에도 대헌장은 외세 프랑스까지 끌어들인 귀족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살아 남았다. 비록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극소수 귀족에게 국한됐지만 민주주의의 싹은 권리청원(1628년)ㆍ권리장전(1689년)으로 피어났다. 미국 독립선언서도 대헌장의 정신을 옮긴 것이다. 보다 주목할 대목은 자본주의가 성장할 토양이 마련됐다는 점. 1233년 대헌장은 39개 조항으로 축소됐지만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권 존중,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 불가의 원칙은 보다 명확해졌다. 산업혁명의 밑거름으로 작용한 영국의 농업혁명도 개인의 재산권이 중시되는 분위기에서 일어났다. 대헌장은 서구 경제의 폭발적 고도성장을 이끈 도화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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