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8월1일] 대한제국 군대해산


[오늘의 경제소사/8월1일] 대한제국 군대해산 권홍우 편집위원 1907년 8월1일, 서울 동대문 훈련원 연병장. 군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식을 갖기 위해서다. 예정시각 오전10시를 넘겨 오후2시까지 집결한 병력은 1,812명. 대상인원 중 절반이 불참했지만 통감부는 서둘러 해산식을 가졌다. 저항이 따랐다. 시위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격분 속에 자결하자 병사들이 총을 들었으나 일본군이 미리 탄약고를 점거한 상황. 탄약이 고갈된 밤11시쯤 전투는 끝났다. 서울시가지 총격전을 지켜본 미국인 의사 애비슨(세브란스병원 공동설립자)이 ‘탄약만 충분했다면 한국군이 승리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을 만큼 아쉬운 전투였다. 지방 상황도 마찬가지. 7개 진위대대 중 원주와 강화도ㆍ수원에서 일부가 항거했으나 8월10일께 3분의2가 해산을 마쳤다. 흩어진 병사들은 의병에 합류, 항일의병의 전력이 강해졌다지만 군대의 붕괴는 망국으로 이어졌다. 누구보다 충격이 컸던 사람은 헤이그 밀사 사건에 빌미 잡혀 강제 퇴위당했던 고종황제. 극심한 인플레이션에서도 국가 총지출의 25~40%를 투입하며 군대를 키웠기 때문이다. 재정규모 자체가 미미했지만 병력 수가 적었기에 대한제국군의 장비는 열강에 버금갔다. 문제는 잡다한 구성.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독일ㆍ러시아ㆍ일본제 소총이 혼재해 보급과 운용의 통일이 어려웠다.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을 무너뜨렸던 미국제 개틀링 기관포는 물론 영국제 암스트롱 대포와 최고급 독일제 크룹 대포도 군대해산이라는 위기에는 쓰이지 못했다. 러일전쟁 이후 득세한 친일파 장교들이 중화기를 일본군 진영으로 빼돌린 탓이다. 방만한 재정과 국방 예산·장비의 효율적 관리 부재, 국가반역 세력이 맞물려 군사력 상실과 국가멸망을 낳은 셈이다. 입력시간 : 2006/07/3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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