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Culture&Life] 현대미술가 전준호

"예술가는 유한한 삶에 질문 던지는 사람

내가 사는 이유 증명하려 작품 만들어요"


우후죽순 '전쟁기념탑 공모' 풍자
2004년 광주비엔날레 수상했지만 '아시아 미술은 손재주' 평가에 충격
돈·권력의 노리개라는 회의감까지

문경원 작가와 '세상 돌아보기' 협력
예술에 대한 진정한 해답찾기 호평
내년 베니스비엔날레 초청 받아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미술행사인 5년제 '카셀도쿠멘타13(2012년)'에 한국 작가로는 20년 만에 참여한 데 이어 '베니스비엔날레(2015년)'의 부름을 받은 작가.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과 같은 해 광주비엔날레 대상 격인 '눈미술상'을 휩쓴 주인공. 동갑내기 문경원 작가와 협업 활동 중인 현대미술가 전준호(45·사진)다. 무려 6년 만인 그의 개인전이 삼청로 현대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가장 '뜨거운' 작가임에도 정작 그의 신작들은 예술은 무엇이며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관한 '차가운' 질문들을 던진다.

방 하나 크기만 한 거울 위에 해골이 엎드려 있다. 백팔배와 천배를 거듭하다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것만 같은 사람의 형상이다. 불상제작용 나무를 섬세하게 손질해 제작된 것이라 원래 해골이 흰색인 것과 달리 이 작품은 흡사 말라죽은 미라의 색깔을 띠고 있다. 작품 제목은 '마지막 장인'. 해골과 거울, 그리고 갤러리 안내데스크에서 받아볼 수 있는 동명의 소설로 구성된 설치작품이다. 소설은 이렇다. 조각가인 '나'는 젊은 시절 불상 조각을 배우려 잠시 조각원에서 일하다 나무 깎는 솜씨가 기막히게 좋은, 그러나 악성 류머티즘으로 고생 중이라 술을 달고 사는 '그'를 알게 됐다. 13년 후 '그'를 다시 만난 '나'는 함께 작업해보자고 제안했고 '평생 뼈가 아픈' 채 살아온 '그'는 '굽고 비틀린 뼈로 멀쩡한 뼈를 깎는' 일을 제안한다. 실제 해골을 구해다 공부해가며 사실적인 해골을 완성하지만 결국 '그'는 죽음을 맞는다.

"이 해골은 실제로 제 친구와 함께 2년 반 걸려 깎은 나무조각입니다. 작가가 되기 전에 불상 조각을 배웠거든요. 소설을 읽고 다시 작품을 보니 어떻게 보이십니까."

작품 앞에서 작가가 말한다. 소설 속 '나'가 전준호인지, 아니면 죽어버린 장인 '그'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순간이다.

"어떤 분은 '저 해골이 장인의 마지막 분골(粉骨)같은 것이구나' 하시더군요. 작품 근처에서 관객이나 비평가의 반응을 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소설을 자전적 실화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고 지어낸 이야기로 넘겨버리는 사람도 있고요. 우리는 늘 습관처럼 작품 '이면'의 내용을 궁금해하니 관객마다 접근 방식은 천차만별이더라고요."

작가는 예술작품을 제시함으로써 관객들이 만들어내는 각자의 해석과 그로 인해 형성되는 '아우라'를 주목했다. 현대미술이 갖는 신화와 우화를 꼬집는 일종의 풍자적 작품이며 조각·거울·소설뿐 아니라 관객의 반응까지도 작품 전체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술평론가 강태희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전준호는 작품과 관련 소설을 함께 제시하는 '간단한' 방식으로 미술작품에 부가된 아우라의 근원과 신화의 발생이라는 간단치 않은 문제를 성공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데 소설가·조각가·장인 모두가 동일인물이라는 이중의 복선은 이 상황극의 백미"라고 평했다. 이처럼 전 작가는 '예술'을 넘어 '예술이라고 하는 것'에 끝없이 반성적·회의적 질문을 던진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은 비참하고 불운했던 고흐의 삶을 통해 그 가치가 다시 매겨지고 잭슨 폴록은 술과 맞바꿔 먹은 그림이 미술관에 소장되는 등 과거사가 자주 거론됩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신화적으로 현대미술을 포장하고 때로는 작품 자체의 아우라보다 그 이면의 신화가 작품을 오독(誤讀)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지점이 됩니다."

맞는 말이다. 신화(神話) 시대인 고대 그리스·로마의 솜씨 좋은 작품들과 달리 현대미술은 '개념'이라는 명분 아래 말(語)이 만드는 신화 속에서 형성된다.

내세울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특별한 계기 없이 화실에 드나들게 됐다는 전준호는 성적이 뛰어나지도, 입시운이 따라주지도 않아 거푸 낙방하다 지방대 미대에 들어갔다. '출신학교'가 중시되던 1990년대 당시 국내 화단은 그에게 단 한 뼘도 정착할 땅을 내주지 않았다. 그런 풍토가 오기를 만들었다. 대학 졸업 이후 불상 공장에서도 일하고 이런저런 사업도 벌인 그는 돈을 모아 영국 유학길에 나섰다. 앤터니 곰리, 애니시 커푸어 등 자신을 감동 시킨 거장들의 출신학교를 추려 영국의 예술 명문 첼시대를 택했다. IMF 외환위기로 급히 귀국한 뒤 디자인회사 실장으로도 일했고 운 좋게 지방대 교수로 4년 근무하며 안정적으로 살 수 있었지만 작품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예술가로서의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2004년 무렵 전국 각지에서 전쟁기념관이 우후죽순 생겼고 거기에 설치할 전쟁기념탑 공모가 많았습니다. 작가들에게는 이런 건 꽤 큰 규모의 돈이 걸린 일종의 사업이었고 앞다퉈 기획안과 시안을 내는 분위기였어요. 당시 이라크파병 문제가 사회이슈였는데 지방에 살며 이런 미술계 상황을 보노라니 너무 웃기더라고요. 그래서 전쟁기념 공원, 평화탑 제작의 원본이 된 석고 모형들을 모조리 빌려와 매끈하게 포장해서 여기저기 설치한 다음 그 군인 모형의 손에 지폐를 쥐어 놓았어요. 이 작품이 2004년 광주비엔날레에 나갔고 상을 받았죠."

이를 계기로 그는 '딱 3년만 작업하겠다'며 가족에게 동의를 구했고 허락을 얻은 다음날 다니던 대학에 사표를 냈다. 절묘한 순간에 인연이 다가왔다. 광주비엔날레에서 작품을 본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세계200대 컬렉터'로 꼽히는 김 회장은 한국의 젊은 작가를 프로모션해 세계적 작가로 육성하겠다는 포부로 국내에서는 처음 '전속계약제'를 도입해 제작비와 전시경비 등을 지원하는 파격을 시도했다. '그 덕에 바젤·베니스를 귀빈처럼' 다녔지만 금융위기 등이 닥치자 끝없이 돈을 쏟아붓는 작가 지원을 계속하는 게 힘들어졌다. 아라리오와의 밀월 기간은 2008년 끝났지만 전준호는 각종 비엔날레와 전시 등에서 이름을 쌓았다. 대표작으로 일명 '지폐시리즈'가 꼽힌다.

"나라별로 지폐가 갖는 보편적 이미지가 있어요.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면서도 국가 정체성을 반영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지폐는 세종대왕·율곡·퇴계 같은 철학적 덕목을 전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요, 뒷면에 등장하는 서원이나 자연은 이상향을 그린 듯하지만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이 마치 인간의 접근을 막아놓은 듯한 묘한 분위기더라고요. 이를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이 꽤 주목받았습니다. 그런데 작품에 대한 해석들이 저에게 한국의 정치적 현상, 사회적 발언을 주로 하는 작가로 '색깔'을 입히더라고요. 살아온 게 비주류라 고독감·상실감의 기조와 시각이 주변과 사회를 행복하게 그리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꼭 그런 정치적 의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죠."

서서히 비평의 부재, 예술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한번은 세계적 컬렉터가 서양미술은 추상화를 중심으로 한 철학의 결과인 데 반해 아시아 미술은 손재주에 의존한 기예로 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잘 팔리는 작가가 훌륭한 작가인가, 한국미술은 무엇인가 회의가 들었다. 미술을 그만둬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에 같은 생각을 가진 문경원 작가를 만났다.

"모스크바·터키·이스탄불로 비엔날레를 따라 움직이는 우리(작가)가 유랑극단 같았습니다. 누가 미술을 원하나, 미술은 돈과 권력에 조장되는 것 노리개일 뿐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래서 문 작가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되돌아보며 작가로서 내가 사는 이유와 이 현장을 증명해보자며 작품을 시작했습니다."

진심 어린 작가들의 질문에 미술계는 진정성으로 답했고 호평이 이어졌다. 지금도 전 작가와 문 작가는 내년 베니스비엔날레를 위해 공동작업을 하지만 각자의 장소로 돌아가면 다시 개인작업에 몰두한다.


"예술가는 뭐하는 사람이냐고요? 사람들이 예술은 대중과의 소통, 시대의 관찰자라고 얘기하는데 내 생각에 나는 '나를 위해' 작업합니다. 내 의식과 존재, 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증거를 만드는 중이라 생각해요. 나의 증명이 사람들에게는 질문으로 보일 수도 있죠. 유한한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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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작가는 스스로 낮추고 지우기를 거듭했지만 그가 만드는 아우라는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그는 평범한 삶에서 신화를 빚는 진짜 예술가였다.

He is…

△1969년 부산

△1987년 해동고

△1992년 동의대 미술대학

△1997년 영국 첼시미술대 대학원

△2001년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 초대전

△2007년 뉴욕 페리루벤스타인갤러리 개인전

△2008년 파리 테데우스로팍갤러리 개인전

△2008년 천안 아라리오갤러리 개인전

△2009년 도쿄 스카이더바스하우스 개인전

△2012년 광주비엔날레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작가상

△2012년 카셀도쿠멘타13

△2015년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예정)

△2015년 취리히 미그로스미술관 '뉴스프롬노웨어' (예정)



남한 화가·북한 식당종업원 만남 '호접몽'처럼 그린 영상작품

■ 개인전서 선보인 '묘향산관'은

전준호 작가의 개인전 '그의 거처'에서는 그의 작품 외에 문경원 작가와의 공동작인 22분짜리 영상작품 '묘향산관'이 함께 선보였다.

'묘향산관'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가상의 북한 식당이다. 베이징에서 개인전을 연 남한의 화가(고수)가 친구들과의 축하연을 위해 식당을 찾았고 이곳에서 신비스러운 북한의 여종업원(한효주)을 만나 애틋한 감정을 갖게 되는 하루 저녁의 사건이 작품을 구성한다. 묘한 분위기와 그에 따른 심리·가치관·상황 등을 무언극·창작무용·퍼포먼스 등으로 긴장감 있게 보여준다. 물론 예술의 본질을 묻는 작가들의 설전도 담겼다.

"묘향산관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곳이에요. 양쪽 정부 통제 없이 남북한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곳이죠. 예술가들이 모여 앉아서 우리가 뭐하냐, 누구를 위해 그림을 그리느냐 등 얘기들을 주고받죠. 사실은 몇 년 전 베이징에서 있었던 동료 작가의 개인전 때 실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복 입은 북한 말투의 여종업원 앞에서 작가도 스무살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했고 서로 '선녀와 나무꾼'이라고 부르며 맞장구 쳐주더라고요. 둘이 주변의 부추김에 밀려 '아침이슬'을 함께 부르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고요. 그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괴했고 그날 새벽 숙소로 돌아와 당장 시놉시스(간단한 줄거리)를 적었습니다."

작품 속 화자는 술 취해 식탁에 엎드려 잠든 동료 작가다. 이 때문에 이 이야기는 호접지몽(胡蝶之夢)처럼 그가 꾼 꿈인지 실제 사건인지 누가 사건의 주인공인지 온통 헷갈린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실제 우리 사회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6일 개막하는 일본 후쿠오카 트리엔날레에도 초청됐다.



사진 이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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