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수중의 달러뿐입니다. 2,400억달러의 외환보유액도, 문제없다는 당국의 말도 믿을 수 없습니다.” (시중은행 자금담당 관계자) 외환시장이 무너져내리고 있다. 수급도 심리도 붕괴됐다. 미 구제금융안이 통과됐지만 글로벌 신용경색으로 달러난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공포가 눈덩이처럼 커지며 ‘신뢰의 위기’가 극에 달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수출업체나 금융기관들이 달러를 움켜쥐기만 해 달러공급 물량은 사실상 끊겼으며 이 때문에 평상시에는 미동도 않는 적은 액수로도 환율이 급등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1,300원대가 목전에 다가왔지만 시장전망은 사실상 시계 제로다. ◇달러 공급 끊겼다=외환시장에서는 사실상 달러 매물이 자취를 감췄다. 달러 공급원인 수출업체들이 수출대금으로 받은 달러를 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달러난으로 기업들의 달러 보유 심리는 최고 수준이다. 반면 달러 수요는 사방에 널렸다. 우선 외국인 주식매도 자금의 환전수요가 엄청나다. 올 들어 30조원 넘게 순매도한 외국인은 이날도 3,000억원가량의 주식을 팔아치웠다. 안전자산 선호현상과 달러 강세에 따른 역외매수세도 불붙고 있다. 최근 급등장 오전에는 어김없이 역외매수세가 발생해 은행권 추격 매수세의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자산운용사의 해외펀드 환헤지 매수와 키코(KIKO) 통화옵션과 관련된 기업체의 매수세도 만만찮다. 여기에 수입업체의 결제수요가 몰리고, 하물며 조선사 등 달러공급원인 수출업체마저 달러 매수처로 가담하고 있다. 수익창출에 바쁜 은행 딜러들 역시 매수세에 동참하고 있다. 온 동네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사투에 가까운 달러 확보 쟁탈전을 벌이는 형국이다. ‘사자’ 세력만 있고 ‘팔자’ 세력은 없어 소규모 매수로도 호가가 급등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권우현 우리은행 외화시장운용팀 차장은 “통상 50개(100만달러×50)를 주문하면 환율이 30~40전 상승했지만 오늘은 7~8원이나 뛰어올랐다”면서 “워낙 호가가 얇아 소액결제로도 환율이 급등했다”고 설명했다. ◇불안심리 악화일로…시계 제로=시장심리는 사실상 공황 상태이다. 환율전망 역시 무의미하다. 미 구제금융안이 통과됐지만 제대로 효과를 거둘지 알 수 없고 실효성이 나타나더라도 상당한 기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즉 외화유동성 부족 사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시장 참가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이윤석 금융연구원 연구원은 “구제금융안 통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유럽의 대외여건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으면서 구제금융안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가 많다”며 “시장에서는 과거 경험상 구제금융안으로 단기간에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실제 지난 1980년대 미 주택대부조합 파산의 경우 1989년 부실자산을 매입하는 정리공사가 출범했지만 이후 3~4년 동안 금융기관 파산 건수는 크게 늘어났고 신용 스프레드도 추가로 확대됐다. 정용택 유진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구제금융이 발효되더라도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확실성 확대는 불가피해 보인다”며 “국내 금융시장 역시 적어도 내년 상반기까지는 신용위험 우려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결국 현재로서는 금융시장 불안과 달러난으로 환율상승 추세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압도적이다. 정미영 삼성선물 리서치팀장은 “신용위기가 확산되고 실물경기도 가파르게 둔화하면서 지금으로서는 환율하락 변수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무너진 불안심리가 회복되지 않으면 추가 상승세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달러난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1,300원대 진입은 시간문제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