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인생의 안정기에 들어서면 전원생활을 꿈꾼다. 신선한 공기가 아침을 깨우고 개나리, 진달래, 들장미, 모란이 나의 영혼을 맑게 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하지만 전원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그것은 낭만이 아니라 하나의 꽃을 피우기 위한 노동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내가 아는 어느 교수는 오래 전 전원생활을 시작했다. 소박하면서도 강단 있는 그의 모습은 학자가 아닌 농부의 모습이다. 그의 일상은 정원을 가꾸는 것부터 시작된다. 이른 아침, 집터 주변의 돌을 주워 돌담을 한층 한층 쌓았고 사계절 꽃을 즐길 수 있도록 오랜 세월에 걸쳐 정원을 조성했다. 백운호수에 위치한 그의 정원에는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의 정원생활은 흡사 헤르만헤세의 '정원일의 즐거움'이라는 수필을 떠오르게 한다. 그와 헤세의 정원생활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어린왕자다. 어린왕자의 장미는 그가 주는 물을 마시고 그와 대화하며 그와 사랑을 속삭여야 한다. 그 속에 생명이 있다. 어린왕자와 장미와의 사귐은 곧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소통을 의미한다. 정원은 TV나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넓은 잔디밭과 울창한 나무가 없어도 좋다. 우리가 사랑을 쏟을 수만 있다면 발코니의 화분 하나가 나의 이상적인 정원이 된다. 화분을 키울 수 없다면 주변 공원이 나의 정원이 된다. 출근길에 스쳐가는 가로수 또한 나의 정원이 된다. 그들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것은 적어도 우리 인간의 몫이다. 요즘 대부분의 아파트에는 대형목이 식재돼 있고 멋있는 외부환경이 조성돼 있다. 삶의 질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면에는 조경에 따라 아파트 값이 달라진다는 경제적 논리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정원은 경제적 논리보다는 나와 함께 숨 쉴 수 있는 실존적 차원으로 승화돼야 한다. 이미 만들어진 정원 보다는 나이와 함께 성장하는 정원이야말로 우리가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원을 가꾸는 것. 나뭇잎을 따주고, 씻어주고, 비 오는 날 흠뻑 물을 적셔주는 이 모든 행위를 통해 우리는 자연을 배운다. 정원은 사람의 심성을 자연에 순화시키는 안식처며 여흥을 즐기는 장소이고 동시에 수신의 구도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