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외환위기를 겪은 사람들] 최종욱 <당시 제일은행 기업분석부장>

"여신관리제 없애 위기 자초" <br>금융권 감시기능 사라져 기업빚 파악도 못해<br>환란은 제역할 못한 정부·은행·기업 '합작품'

최종욱 제일창업투자 고문은 194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67년 12월 제일은행에 입사, 2001년까지 34년간을 제일은행에 근무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부산상고 동기이기도 한 최 고문은 기업금융 분야에서는 최고의 전문가다.

[외환위기를 겪은 사람들] 최종욱 "여신관리제 없애 위기 자초" 금융권 감시기능 사라져 기업빚 파악도 못해환란은 제역할 못한 정부·은행·기업 '합작품' 이철균 기자 fisioncj@sed.co.kr 사진=김동호기자 최종욱 제일창업투자 고문은 194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67년 12월 제일은행에 입사, 2001년까지 34년간을 제일은행에 근무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부산상고 동기이기도 한 최 고문은 기업금융 분야에서는 최고의 전문가다. 관련기사 • 김용환 "DJ '換亂극복' 선언 왜 서둘렀는지…" • 김중수 "잠재성장률 저하 가볍게 봐선 안돼" • 최종욱 "제역할 못한 정부·은행·기업 '합작품'" • 유종근 "DJ불신에 美와 외채협상 제일 힘들어" • 이연수 "정부 '하이닉스 무조건 팔아라' 독려" • 정덕구 "대선 휘말려 신종 경제위기 올까 걱정" • 위성복 "기업 사정 모른채 구조조정 밀어붙여" • 손병두 "대우그룹 몰락, 정부도 일부 책임있다" • 김대송 "증권사 무분별 해외진출 리스크 크다" • 이용득 "관치금융이 환란 부른 결정적 요인" • 강봉균 "대우, 구조조정 서둘렀으면 해체 안돼" “90년대 초에 기업경쟁력 강화와 규제 완화라는 이름 아래 주거래은행을 중심으로 한 기업에 대한 총체적인 여신관리 시스템이 사라졌다. 그 결과 은행들은 각자가 빌려준 빚의 규모가 알았지 한 기업의 전체 금융 부채가 얼마인지도 몰랐다.” 최종욱 제일은행 전 기업분석부장(현 제일창업투자 고문ㆍ59)은 외환위기 이전에 기업의 과잉ㆍ중복 투자가 발생한 이유에 대해 “금융기관의 관리 시스템 부재”를 들었다. 이미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재계의 논리에 밀려 기업 부실에 대한 금융권의 감시 기능이 없어졌다는 얘기였다. 그는 97년부터 2001년까지 당시 최대 기업 금융기관이었던 제일은행에서 기업 구조조정의 실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제일은행은 당시 10대 그룹 중 7대 그룹의 주 거래은행이었던 만큼 웬만한 기업의 워크아웃은 모두 최 고문의 손을 거쳤다. 그는 또 기업의 단기 외채가 순식간에 급증한 데 대해서도 “대다수 자금이 사실상 국내 은행들이 빌려준 것”이라고 증언했다. 국내은행의 해외지점들이 외국 자금을 유치, 기업들이 발행한 해외 전환사채(CB)를 사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외국 자본이 동남아 외환위기 이후 단기 외채를 회수하기 시작하자 국내 기업들은 지급불능 사태에 빠졌고 은행권의 위기도 심화됐다. 결국 은행권의 감시 소홀과 정부의 무책임, 기업들의 모럴 해저드는 외환위기를 부른 또 하나의 도화선이었던 셈이다. -97년 당시 기업들의 상황은 어땠나. ▦외환위기 이전부터 기업들의 부실화 정도는 상당했다. 재벌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까지 빚 내서 투자하는 꼴이었다. 은행이 여신을 연장해주지 않을 경우 연쇄적인 부도가 불가피했다. 97년 IMF상황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래도 (여신연장이) 가능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은행권의 여신 연장이 한계에 이르면서 97년1월 한보를 시작으로 거대 기업들의 도산이 시작됐다. -기업의 과잉중복 투자가 심화된 이유는 뭔가. ▦90년대 초로 기억한다. 당시 정부는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킨다는 명분으로 주거래은행이 갖고 있던 기업에 대한 종합적인 여신관리제도를 없앴다. 그 이전만해도 기업들은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주거래은행의 승인을 받았다. 물론 기업들이 자유롭게 투자를 하는 데는 지장이 있었을 게다. 하지만 최소한 기업들의 과잉 중복투자를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이 없어지면서 기업은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경남에 사천이라는 지역이 있다. 그곳에 비행기를 만드는 공장을 세운다고 삼성, 대우 등 3개 재벌기업이 비슷한 지역에 대규모 땅을 매입했을 정도다. -97년 이전부터 언제든지 IMF와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는 이야긴데. ▦당시 미국을 갔다 왔던 사람들은 6개월 전부터 달러를 사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했다. 한국이 한번 크게 망할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97년은 외환위기가 발생했다는 시기였을 뿐, 그 전부터 위기징후는 많았다. 기업의 경영 상태만 봐도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도 당시 기업들이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하곤 하지 않았나. ▦90년대 국내기업 중 해외에 알려진 기업은 많지 않았다. 해외 투자자들이 국내기업의 뭘 믿고 투자를 하겠는가. 기업들이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할 때 주로 사용하는 게 해외CB 발행이었다. 나중 알고 보니 국내은행의 해외지점에서 국내 기업의 CB를 사주는 구조였다. 더구나 이들은 국내에서도 자금조달이 안 되는 기업들이 대다수였다. 은행이 오른쪽 호주머니 돈을 왼쪽 호주머니를 통해 빌려줬던 셈이다. -은행에서 그런 총체적인 관리 시스템이 없었다는 것인데. ▦IMF 당시 은행에서는 기업에 대한 총체적인 관리시스템이 없었다. 외환위기가 터진 뒤 삼보컴퓨터 최고 경영진들이 해외CB 만기가 도래했다며 자금 지원을 해달라고 급하게 찾아왔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CB도 제일은행과 산업은행 해외지점이 매입한 것이었다. 동일 은행에서도 한 기업의 여신에 대한 종합적인 정보가 부족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은행이 갖고 있는 여신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2001년 제일은행은 뉴브릿지로 넘어갔는데. ▦가장 안타까운 측면이다. 제일은행을 팔더라도 국내 은행이나 산업자본에 넘겼어야 했다. 사모펀드인 뉴브릿지에 넘기는 과정에서 매각 옵션 중 하나가 ‘추가 부실을 정부가 책임진다’는 대목이다. 여신을 갖고 있던 기업이 추가부실이 발생할 경우 이를 정부가 보전해준다는 이야기다. 뉴브릿지로 회사가 넘어가기 전에 당시 제일은행이 갖고 있던 대기업 여신을 모두 다른 은행으로 넘겼다. LG는 신한은행, 대우는 당시 상업은행 등으로 바꿨다. 구조조정 등이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실제 발생했다. 뉴브릿지는 굳이 기업을 구조조정해 우량기업으로 탈바꿈 시킬 필요가 없었다. 뉴브릿지로 넘어간 뒤 제일은행이 갖고 있던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가장 더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대우그룹 구조조정도 직접 맡지 않았나. ▦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간 대우그룹은 당초 제일은행 안대로 했다면 공적자금 덜 들어갔을 것이다. 대우그룹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146개의 계열사를 갖고 있던 이탈리아 기업의 구조조정 사례를 모방해 만들었다. 청와대에 최초 보고를 했는데. 회사를 클린컴퍼니(우량기업)와 배드컴퍼니(부실기업)로 나눠 청산할 기업은 청산하고 살릴 기업은 살리자는 내용이다. 그런데 김우중 당시 회장이 반대했고, 이를 정부 역시 관철시키지 못했다. 그룹 계열사 전체를 끌고 워크아웃을 하겠다고 끌면서 결국 공적자금만 더 들어가게 됐다. 그러나 3년이 지난뒤 2002년에야 최초 프로그램대로 진행했다. -워크아웃 제도를 제일은행에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워크아웃 프로그램 초안도 제일은행에서 만들었다. 6개월간은 거의 집에도 가지 못할 정도였다. 워크아웃 관련제도가 어떻게 도입됐는지 아직까지 잘 모르더라. 당시 워크아웃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기업구조조정 협약이 필요했다. 당시 협약은 영국의 ‘런던 어프로치’를 모델로 삼았다. 영국에서 70년대 후반 외환 위기가 발생하자 중앙은행이 중심 돼 모든 금융기관이 참여하는 ‘신사협정’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런던 어프로치다. 부실징후기업을 선별하는 프로그램은 제일은행이 갖고 있던 것을 이용했다. 입력시간 : 2006/12/28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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