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5월 5일] <1688> 서독 주권회복


'연합국의 점령통치 종식. 서독의 주권회복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ㆍNATO) 가입.' 1955년 5월5일자로 발효된 파리조약의 골자다. 파리조약은 전환점이었다. 서독의 나토 가입에 자극 받은 소련과 공산권은 5월17일 바르샤바조약기구를 공식 출범시켰다. 본격적인 냉전시대가 열린 것이다. 파리조약은 체결 이전부터 논란과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서독의 재무장'이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서독 내부의 여론이 엇갈렸다. 재무장을 추진하는 아데나워 총리의 정책에 반발한 내무장관이 사임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프랑스도 극구 반대했다. 보불(프로이센ㆍ프랑스 전쟁, 1870년)에서 1ㆍ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군사력에 번번이 당했던 프랑스는 독일을 수십 개 군소 농업국가로 만들 심산이었다. 미국도 2차 대전 직후까지는 프랑스와 생각이 비슷했으나 소련의 팽창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서독의 잠재력을 유럽 방위에 활용하기로 작정한 미국은 '마셜플랜'으로 유럽의 전후복구를 지원하는 한편으로 서독의 재무장을 위해 영국과 프랑스 설득에 나섰다. 프랑스의 고집이 꺾인 계기는 한국전쟁. 유럽도 소련에 침략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미국과 영국ㆍ프랑스 등 3개국은 점령국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독일에 동맹이라는 방석을 내줬다. 나토에 들어온 서독군은 얼마 안 지나 병력과 장비에서 유럽 방위의 중추로 자리잡았다. 강대국의 이해관계와 냉전격화로 앞당겨진 '패전국가 독일'의 주권회복에는 경제적 상호신뢰가 깔려 있었다. 1951년 유럽석탄ㆍ철강공동체(ECSC)를 출범시킬 만큼 신뢰가 쌓였으며 서독의 경제력이 급신장해 파트너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 라인강의 기적이 없었다면 서독은 좀 더 오랜 시일 동안 피점령국가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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