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드라마 '로스트'와 한미FTA

경쟁력 있는 콘텐츠 제작 절실··· 시장개방, 오히려 기회될 수도

로스트, CSI, 위기의 주부들, 섹스 인 더 시티…. 요즘 들어 한국 시청자들의 영혼을 매혹시키고 있는 미국산 대작 콘텐츠들이다. 이들 콘텐츠는 이미 외국 드라마를 통한 타 문화 체험 차원이라는 일상적인 경험을 넘어서 뭔가 커다랗게 부각되는 하나의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드라마 로스트에 나오는 ‘디 아더스(정체를 모를 외부인)’가 뜨거운 얘깃거리가 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섹스 인 더 시티의 주인공 사라 제시카 파커가 연출하는 뉴욕풍 패션스타일은 서울에서 보편적인 심벌이 돼 있다. 범죄과학수사대를 의미하는 CSI 라스베이거스ㆍ마이애미ㆍ뉴욕 시리즈는 한국형 드라마 폐인ㆍ중독자ㆍ마니아를 양산해 수많은 인터넷 블로그와 커뮤니티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한국 시청자 중 상당수가 한국 TV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대신 미국 드라마에 탐닉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드라마가 한류 열풍을 이끌었고 지금도 주몽이나 연개소문과 같은 멋진 사극들이 선전하고 있지만 대세는 어딘가로 급속히 기울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른바 디지털 원어민이라고 불리는 10~30대 네티즌 세대들의 움직임이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는 얘기다. TV보다 인터넷이 더 편한 젊은층이 인터넷을 뒤져 몰래 접근해서 득의만만하게 가져올 수 있는 동영상 형태의 콘텐츠로 죄다 쏠리고 있다. 이는 문화적 망명으로까지 비견할 수 있을 정도다. 이 같은 이탈과 출타가 앞으로 더 늘어난다면 10년 후 한국의 미래 인재요 주역이 될 디지털 원어민들은 가족의 가치나 순수한 사랑보다 배타적 성공과 쾌락적 만남에 더 열중할 게 분명하다. 이는 잘 보이지 않는 변화이지만 우리가 가꾸려고 하는 공동체의 정체성과 연결해본다면 중대한 쟁점이 될 수도 있다. 마침 방송과 인터넷 등 시청각 서비스 시장 개방을 포괄하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이뤄지고 있어 몇 가지 이슈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는 인터넷 공짜 심리를 제어하는 일이다. 미국 드라마가 삽시간에 한국을 휩쓴 것은 단연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초고속망 인프라 덕분에 한국 네티즌들은 최신 미국 드라마도 쉽게 구해 보며 일약 세계시민으로 변신했지만 공짜와 편법이 판을 치는 비정상적 분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당장 이를 제어하지 않는다면 콘텐츠로 생업을 하는 창작자 집단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우리 네티즌들이 자율적 규제를 거부하거나 늦춘다면 미국 드라마 제작사들이 직접 한국 인터넷에 톨게이트를 설치하는 굉음이 들릴지도 모른다. 둘째는 우리 콘텐츠 생산성을 높이는 과업이다. 현재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드라마 로스트의 경우 여러 전문 작가들의 집단공동창작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또한 수년간에 걸친 연구, 조사와 기획 및 시뮬레이션이라는 자본집약적 할리우드 작업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 드라마는 1인 작가 체제와 급행 제작이라는 무리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드라마가 곧 FTA가 논의하는 서비스 상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과 미국간 경쟁력 격차를 고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이는 곧 산업 생산성 문제로 귀결된다. 시청자들이 미국 드라마로 짐 싸서 가는 이유도 실은 로스트나 CSI가 더 재미있고 와 닿게 잘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방송사 등이 효율책임 경영, 구조혁신 등으로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을 FTA 협상을 계기로 꼭 찾아내야 한다. 셋째는 협업으로 상호의존도를 강화하는 전략이다. 요즘 뜨는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인연이나 업보ㆍ수양과 같은 아시아적 가치를 핵심 코드로 채택하곤 한다. 스스로 진부함을 벗어나고도 싶고 중국 등 거대시장을 공략하고자 하는 심산이다. 여기에 기회가 있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에 배우 김윤진과 스토리작가 김수진이 참여한 사례가 좋은 모델이다. 해리포터나 와호장룡에서 보듯이 콘텐츠는 미국이 원산지라도 원작과 배우ㆍ이미지ㆍ메시지 등 다양한 요소는 초국적으로 합쳐 만들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좋은 스토리와 인력으로 미국 영화ㆍ게임ㆍ드라마의 골자를 우리가 맡아 상호의존도를 높여나간다면 FTA나 시장 개방도 두려워할 일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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