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포퓰리즘이 국가흥망 가른다] <8> 영국- 휘청대는 파운드 경제

재정난·금융위기로 성장엔진 스톱… 직장 잃은 서민들 길거리에 나앉아<br>BOE, 물가압력 불구 경기에 올인… 29개월째 기준금리 0.5%로 동결<br>정치권은 해법 놓고 지루한 논쟁…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불만 커져

영국의 신(新) 금융지로 부상하고 있는 카나리 워프(Canary Wharf) 광장에 모인 런던 금융인들이 분수대 앞에서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다. 영국 경기침체와 글로벌 주가 하락으로 이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런던=서정명기자


지난 5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버킹엄궁전 옆에 위치한 세인트 제임스 공원. 직장인들이 공원을 가로질러 출근길을 재촉하고 있지만 여기저기 놓인 벤치에서는 걸인들이 구걸에 나서기 위해 하나둘씩 짐을 챙기고 있다. 처음 공원을 찾는 이방인이나 관광객에게는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신을 제임스(56)라고 소개한 걸인은 "경기침체가 오래가다 보니 직장을 잃고 나처럼 걸인 생활을 하는 빈민층이 늘어났다"며 "공원 비둘기들에게 빵 부스러기를 주는 게 유일한 낙"이라고 말했다. 영국 왕실가족이 거주하는 버킹엄궁전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 이면에는 길거리에 나앉은 걸인들의 초라한 현실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18세기 산업혁명을 일으키며 '파운드 경제' 신화를 만들어냈던 영국은 세계 2차대전 이후에는 경제패권을 미국 '달러 경제'에 내주고 말았다. 이제는 과잉 포퓰리즘에 따른 재정적자와 2008년 글로벌 신용위기에서 야기된 금융산업 붕괴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추락하는 파운드 경제=파운드 경제의 날개 없는 추락은 성장률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영국의 성장률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2008년에 -0.1%로 떨어졌고 2009년에는 -4.9%까지 급락했다. 지난해에는 1.4%로 다소 회복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올해 1ㆍ4분기와 2ㆍ4분기에는 성장률이 각각 0.5%, 0.2%에 그쳤다. 2006년 5.5%에 머물렀던 실업률은 지난해 말 7.8%까지 치솟았다. 런던의 신(新) 금융센터로 부상하고 있는 카나리워프에 위치한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 본사에서 만난 크리스 크로 부사장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7년까지 제조업 경기가 호황을 누리면서 영국 경제는 양호한 성장률을 보였다"면서 "하지만 이후 제조업 경쟁력이 떨어진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아 금융산업이 무너지면서 영국 경제는 침체의 늪에 빠졌고 파운드 가치도 약세로 방향을 틀었다"고 말했다. ◇BOE는 29개월째 '금리동결'=현재 영국 중앙은행(BOE)은 물가안정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포기한 채 성장률 끌어올리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영국 경제는 경기침체의 늪에 빠져 있지만 소비자물가지수(CPI)는 5월과 6월 각각 4.5%, 4.2%까지 치솟았다. 물가관리목표치(2%)의 2배를 상회하는 높은 수준이다. 본드 거리(Bond Street)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나타샤씨는 "부가가치세 등 세금이 자꾸 올라가는 상황에서 물가마저 상승하고 있어 생활고가 이어지고 있다"면서 "언제까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지 고통스럽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국제신용평가회사인 피치(Fitch)는 유럽경제의 스태그플레이션을 경고하면서 이중 영국 상황이 가장 심각하다고 경고할 정도이다. 이처럼 물가상승 압력이 가중되고 있지만 BOE는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로 기준금리를 29개월째 0.5%로 동결하고 있다. 금리인상에 나서 인플레이션 압력을 선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게 일고 있지만 BOE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경제 살리기에 '올인'하는 영국 정부의 다급한 심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동당의 '플랜 B' VS 보수당의 'TINA' 대결=영국 정치권은 과잉 포퓰리즘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비롯된 경기침체를 해결하는 방안을 놓고 지루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야당인 노동당은 증세가 아닌 감세를 통해 기업들의 설비투자를 늘리고 일자리 창출에도 나서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른바 '플랜 B'다. 이에 대해 집권여당인 보수당은 'TINA(There Is No Alternative)'로 맞대응하고 있다. '더 이상 대안은 없다'라는 의미로 과잉 포퓰리즘의 부산물인 막대한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를 줄이기 위해서는 재정긴축과 증세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 보수당은 부가가치세를 20%까지 올렸고 법인세도 26%까지 상향 조정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싱크탱크인 데모스의 조너선 버드웰 수석연구원은 "노동당은 정권을 잡았을 때 부가가치세를 내리고 보수당은 반대로 부가가치세를 올리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면서 국민들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며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권을 비판했다. 정치권 갈등은 5월 고든 브라운 전(前) 노동당 총리가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자리에 적합한 인물인지 여부를 놓고 최고조에 달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자국 인물이 국제기구의 수장이 되는 것을 지원하기는커녕 영국 경제를 망친 장본인이라고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브라운 전 총리는 IMF 총재의 꿈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과거 포퓰리즘 정책이 영국 경제를 얼마나 많이 갉아먹었고 이에 따른 부산물로 영국 정치권이 어떠한 홍역을 치르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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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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