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100세 시대의 그늘 노인자살] <1> 침묵의 선택

질병·빈곤·고독… 황혼의 불청객 탓에 극단적 삶 포기 잇달아<br>치료약 일부러 거르며 '자식에 부담주기 싫다' 스스로 죽음 재촉<br>남에게 안 알리고 치밀하게 계획·실행… 예방도 쉽지않아

한 시립 노인요양원에서 휠체어를 탄 어르신이 혼자 산책을 하고 있다. 경제적 고통, 신체질환, 외로움 등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노인들이 늘고 있다. /서울경제DB



부산에 거주하는 이모(57)씨는 2년 전 겨울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는 91세의 고령이었지만 아직도 직접 토마토농장을 경영할 정도로 건강했다. 장례식장에서야 어머니가 비닐하우스에서 홀로 목을 맸다는 사실을 알았다.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았다.

이씨는 "가끔 전화가 와서는 내가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아들ㆍ손자 내외가 귀찮아하는 것 같다며 섭섭해 하고는 하셨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좀 더 자주 전화를 하고 찾아 뵈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아직도 어머니를 혼자 외롭게 돌아가시게 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경북에 사는 천모(86) 할머니는 무릎 관절염과 당뇨병이 악화돼 벌써 5년째 병석에만 누워 있다. 할아버지는 10년 전 뇌졸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서울에 살고 있는 자식들은 간병인만 붙여놓은 채 한 달에 한번꼴로 얼굴을 비친다. 혼자 화장실도 갈 수 없는 할머니로서는 아침에 눈을 떠 잠들 때까지 TV만 본다. 언젠가부터 할머니는 가끔 반드시 먹어야 할 당뇨병약을 일부러 거른다. 몇 개월 새 벌써 2번이나 응급실에 실려갔다. '내일 아침에는 눈을 뜨지 않으면 좋겠다'는 것은 할머니의 소망이 됐다.

하루에도 수십명의 노인들이 자살로 삶을 끝내고 있다. 사망자의 2~3배가 넘는 사람들이 자살을 계획하고 있거나 자살을 시도한다. 천 할머니처럼 꼭 먹어야 하는 약을 거르는 식으로 죽음을 재촉하는 노인들도 많다.

수많은 노인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크게 ▦노화에 따른 신체적 질환 ▦빈곤 등의 경제적 고통 ▦가족과의 불화 등으로 인한 외로움을 이유로 꼽는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투신한 학생, 실직 이후 목을 맨 회사원과 달리 노년층에서는 특별한 사건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보다 이 세 가지가 복합적이고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신체 질환으로 인한 정신적ㆍ육체적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것은 노년층에서 특히 두드러진 현상이다.

'행복전도사'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하던 방송인 최윤희(67)씨는 지난 2010년 가을 남편과 함께 일산의 한 모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가 밝힌 자살의 사유는 루프스 질환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

"2년 전부터 여기저기 몸에서 경계경보가 울렸습니다. …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이해할 것"이라는 유서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2005년에는 유태흥 전 대법원장이 마포대교에서 투신하는 것으로 86년의 삶을 끝내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허리의 지병으로 인한 고통을 수년간 토로해오던 그는 증상이 악화되자 이를 비관했다고 한다.


지난해 5월 어버이날에는 만성 질환으로 고통 받던 60대 부부가 함께 목숨을 끊은 사건도 발생했다. 중증 노인성 치매를 앓는 남편 전모(69)씨를 수년간 돌본 노모(62)씨는 본인이 암에 걸려 수술을 받은 후 줄곧 우울감에 시달려왔다. 결국 노씨는 자식들에게 여행을 권유한 후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남편의 목을 조르고 자신도 베란다에서 목을 맸다. "고맙고 미안하다. 우리가 함께 죽어야지 어느 하나만 죽으면 너희에게 짐이 될 것 같다"는 유서를 남긴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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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에 따른 비관자살은 노인 자살의 이유로 가장 빈번하게 거론되는 항목이다. 노후 준비는 안 돼 있는데 퇴직ㆍ실직 등으로 발생한 경제적 어려움이 노인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국내 노인인구의 45.1%는 소득이 중위소득(총 가구 중 소득순으로 순위를 매긴 후 정확히 가운데를 차지한 가구의 소득)의 3분의1에도 미치지 못하는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3.3%)은 물론 영국 10.4%, 일본 20.5%, 미국 23.7% 등과 비교해 2~4배가량 높다.

가족 해체 등으로 인한 사회적 고립도 노인 자살의 위험요인으로 꼽힌다.

국내외에서 행해진 각종 연구는 사회적 지원 수준이 높은 노인일수록 스트레스와 우울감이 낮은 반면 가족지원체계와 사회적 지원체계가 취약할수록 노인들의 자살률이 높아진다는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최명민 백석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심리ㆍ사회적 지지체계가 필요한데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1차 가족체계가 그 역할을 해왔다"며 "최근 가족의 해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반면 사회적 안전망 구축은 아직 미흡하다 보니 개인을 위험에서 보호해줄 완충장치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런 이유들로 발생하는 노인의 자살은 청소년이나 장년의 자살에 비해 좀 더 치명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하규섭 한국자살예방협회장은 "응급실에 실려온 자살 시도자와 실제 사망자를 비교해볼 경우 젊은 사람들은 평균 10~20번의 시도 끝에 1명이 실제 사망하지만 노인의 경우 그 비율이 4대1 수준으로 매우 높다. 젊은이들이 충동적으로 칼로 손목을 긋는 등의 다소 성공률이 낮은 자살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반해 노인들의 경우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맹독 음독 등 치명적인 수단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젊은층에 비해 쇠약해진 육체적 조건도 노년층의 자살률이 높은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자살행동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도 노인 자살의 특징이다.

과거 자살 시도 경험은 향후 자살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강력한 요소 중 하나지만 노인 자살의 경우 과거 자살을 시도했던 경험이 없는 경우가 많다. 자살계획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경우도 다른 세대에 비해 훨씬 드물다.

"청소년의 자살 시도는 '도와달라'는 비명(Cry for help) 또는 신호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지만 노인 자살은 은밀하고 치밀한 준비 끝에 실행되는 경우가 많기에 예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런 여러 특징들로 전문가들은 노인 자살을 '침묵의 자살(Silent Suicide)'이라 부르며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조언한다.

이런 노인 자살의 양적ㆍ질적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소년이나 장년 자살에 비해 덜 비극적이라고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최근에는 "너무 오래 사는 것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현명하다"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며 자살을 택하다니 부모님의 마음이란 참 아름답다"며 노인 자살을 미화하는 분위기마저 나타나고 있다.

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은 "아직도 국민의 30%가량은 자살 문제를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고령 노인에 대한 자살에 대해서는 특히 더 관대한 경향을 보이고는 한다. 노인이 후세대의 존경을 받으면서 존엄한 모습으로 끝까지 살아갈 때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건강해질 수 있다"며 우리 인식의 변화를 촉구했다.

김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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