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15일 8ㆍ15경축사를 통해 제안한 '통일세 논의'는 이제 남북통일에 대한 실질적 준비를 위해 막대한 금액의 통일비용을 미리 준비할 때가 됐다는 현실적인 다급함에서 나온 것이다.
아울러 이 대통령은 3단계 통일방안을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비핵화가 선결된 평화공동체 단계와 경제협력이 이뤄지는 경제공동체 단계를 거쳐 민족공동체 단계에 이르러 완전한 통일을 이루는 민족화합의 경로를 보다 구체화했다.
다만 이 대통령은 "지난 3월26일 북한의 천안함 공격은 평화에 대한 여망을 저버리는 도발이었다"고 거듭 강조하며 북한 측의 현실직시와 변화를 촉구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 북한의 전향적 변화가 있다면 남북관계는 공존과 발전의 새로운 전기가 만들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대결과 정체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남북통일 '재원' 마련 의지=이 대통령은 이날 경축사에서 "통일은 반드시 온다"며 "이제 통일세 등 현실적인 방안도 준비해야 할 때가 됐다"고 역설했다.
일각에서는 이렇게 통일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를 제안한 것은 최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과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김 위원장의 유사시 권력승계 과정에서 자칫 수년 내라도 북한체제의 급격한 변동이 생기는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8ㆍ15경축사에서 제안한 '통일세 논의'에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통일재원을 미리 준비함으로써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이 대통령의 제안은 통일을 놓고 그동안 일부에서 벌어졌던 소모적인 이념논쟁을 지양하고 통일이 현실 문제로 다가올 경우를 대비해 실질적인 대비책을 준비해놓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실제로 남북 간 경제적 격차 등에 따른 엄청난 통일비용 때문에 일부에서는 통일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통일세 제안'을 통해 통일비용이 통일의 걸림돌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임태희 대통령실장은 이날 기자 브리핑에서 "이 대통령의 통일세 제안은 강제병합 100주년, 광복 65주년을 맞아 진정한 의미의 광복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통일까지 가는 과정이 완성돼야 진정한 대한민국의 광복이 아니겠냐는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다"면서 "남과 북이 민족공동체로 가는 단계에서 남북 간 격차를 줄이는 비용이 필요하고 우리가 염원하는 통일도 그 비용을 우리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말했다.
◇'비핵화 선결' 원칙 못박아= 평화공동체ㆍ경제공동체ㆍ민족공동체 순으로 이행하는 이 대통령의 3단계 통일방안은 과거 김영삼 정부 때와 비슷하지만 당시는 평화와 경제공동체가 동시에 진행될 수 있는 개념이었으나 이번에는 비핵화의 중요성을 감안, 평화공동체가 반드시 선결되도록 한 점이 다르다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지금 남북관계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며 "주어진 분단상황의 관리를 넘어서 평화통일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우선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평화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한반도 비핵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 뒤 "나아가 남북 간의 포괄적 교류ㆍ협력을 통해 북한경제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고 남북한 경제통합을 준비하는 '경제공동체'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를 토대로 궁극적으로는 제도의 장벽을 허물고 한민족 모두의 존엄과 자유, 삶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민족공동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이 제시한 3단계 통일방안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9년 9월11일 국회 특별선언을 통해 밝힌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김 대통령이 이를 토대로 1994년 8ㆍ15광복절 경축사에서 천명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보다 세부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평가된다.
임 실장은 "남북관계는 흔히 상식으로 공개되는 내용으로 접하는 것보다 대단히 역사성을 띠고 민감하다. 외과수술이 아니라 아주 난이도가 높은 신경수술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면서 "남북문제에 관한 여러 사항은 관련 정부부처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 진행하기 때문에 빠르게 변화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고 설명했다.
◇북 태도 불변 땐 '경색' 지속= 그러나 이 대통령은 북한에 "3월26일 북한의 천안함 공격은 평화에 대한 여망을 저버리는 도발이었다"고 규정한 뒤 "이제 더 이상 북한의 어떠한 도발도 있어서는 안 되며 용납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이제 현실을 직시해 용기 있는 변화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며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번에도 '북한의 변화'를 남북관계의 선결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또한 그동안 현정부가 견지해온 '비핵ㆍ개방ㆍ3000'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임 실장은 "8ㆍ15 경축사에서 이 대통령의 남북관계 발언은 통일세를 제외하면 과거와 별 차이가 없다"면서 "남북관계는 선언이나 말보다 철저하게 준비된 행동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8ㆍ15경축사에서 제시된 통일세 제안과 3단계 통일방안에 대한 북한의 반응은 일단 부정적일 듯하다. 우선 북한의 핵폐기를 전제로 한 '평화→경제→민족공동체' 등 3단계 통일방안에 대해서는 현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강조해온 '선 핵 폐기'를 고수했다는 점에서 북측의 호응을 끌어내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전문가들은 통일세에 대한 북한 측의 강력 반발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남북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통일세를 언급한 데 대해 북측이 오해할 수 있다"며 "급변사태와 이에 따른 남한으로의 흡수통일을 남 측이 염두에 둔 것 아니냐고 북측이 반발할 수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