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22일] 피의 일요일

1905년 1월22일(러시아력 1월9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 광장. 일요일을 택한 15만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차르(황제)를 직접 면담하겠다며 평화적 행진을 시작했다. 요구사항은 하루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 보장. 노동자들은 황제를 믿었다. 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성은(聖恩) 대신 총알이 날아왔다. 경찰과 군대의 무차별 사격에 흩어지는 시위대의 목덜미에는 코사크 기병대의 칼날이 꽂혔다. 사망자만 800여명, 부상자는 3,000명이 넘었다. 광장은 피바다로 변했다. 황제와 조국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신뢰도 단박에 깨졌다. 러시아혁명의 불을 댕긴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맞섰다. 구호도 변했다. '차르는 없다' '전제를 타도하자'. 4월까지 파업 참여자는 81만명으로 불어났다. 지방에서도 농민봉기가 잇따랐다. 5월 농민ㆍ노동자와 군대간 무력충돌이 발생하더니 6월 말엔 전함 포템킨호 수병들의 반란까지 발생했다. 전국 총파업(10월)으로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니콜라이 2세는 손을 들었다. 국민의 기본권과 시민권을 보장하고 의회구성을 허용한다는 황제의 '10월 선언'이 나왔다. 이듬해 5월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간접선거에 의한 두마(의회)의 성립에 노동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러시아 1차 혁명도 막을 내렸다. 피의 일요일을 부른 것은 패색이 짙어가던 러일전쟁과 경제난, 무기력한 조국에 대한 실망과 실업, 임금삭감, 물가와 소작료 폭등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표출된 것이다. 한번 터진 둑에서 나온 저항의 물결은 1917년 사회주의 혁명까지 흘렀다. '피의 일요일'에 울렸던 총성은 전제왕정 종식은 물론 세계사를 전환시키는 신호탄이었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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