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이중잣대부터 버려야 2만弗시대 진입 가능

■ 두 얼굴의 한국

‘두 얼굴의 한국’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중성, 이중잣대에 있다.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대통령을 ‘국부’로 부른다거나 자본주의로 먹고 살면서 사회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것이 대표적 예다. 국민들 의식 속에 민족애와 지역주의, 능력주의와 평등의식이 혼재돼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중적인 모습이 보여지고 있으며, 이 같은 현상은 확대 재생산 돼 곳곳에서 분열과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기업을 보는 시각이다. 기업을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라고 인식하면서도, 사회공헌과 분배 문제가 불거지면 ‘뭇매’를 가한다. 또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면서도 기업이미지를 물으면 부정적으로 대답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지난해 말 상공회의소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의 60%가 기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며, 특히 기업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67%에 달했다. 기업도 이중성, 이중잣대의 함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노사분규가 일어나면 공권력 투입 등 법대로 처리할 것을 주문하면서도 오너나 경영진에 불리한 문제가 터져 나오면 선처를 요구한다. 또 모든 일은 원칙에 따라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주요 현안이 나타나면 인맥과 정보부터 챙긴다. 정부 역시 예외가 아니다. 국민과 기업을 고객으로 생각하는지 단속대상으로 생각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마음과 행동이 다르면 수시로 이중성, 이중잣대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명분을 중시하는 것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명분은 선악(善惡)의 이분법으로 모든 것을 재단한다. 특히 명분은 극단적인 대립을 강조할수록 선명해지는 속성이 있어 선명성은 늘 그 세계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무기가 된다. 자신의 이익관계는 숨긴 채 선(善)의 명분을 선명화 시킬수록 현실적 기선 잡기에 유리하다는 것. 이처럼 공개적으로 이익을 놓고 협상을 벌이기보다는 선악의 대결인 양 호도하니 타협은 성사되기 어렵다. 우리의 의식 밑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이중성, 이중잣대는 부(富)와 교육에 대한 접근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청빈의 미덕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10억 만들기와 같은 부자 따라 하기 열풍에 편승, 각종 펀드에 무작정 투자하거나 부동산 투기에 합류한다. 특히 사회의 학벌주의를 개탄하면서도 자신의 아이들을 숱한 과외 전선으로 내몬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지식이래야 CD롬 한 장 분량밖에 안 되는데도 이웃집 아이에게 뒤질 수 없다는 부모들의 이중적 강박관념이 아이들을 오로지 점수에 매달리는 학습노예로 전락시키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공허한 명분을 앞세운 각종 주의ㆍ주장과 맹목적 사리사욕의 속물근성이 혼재하면서 중심가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중심가치가 없는 공간에는 이중성, 이중잣대에서 발원한 합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만이 난무하고 있다. 합성의 오류란 개인이나 이익집단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행동이지만 공익(국익)을 배제한 채 동시에 이뤄지면 사회 전체적으로 엄청난 희생과 비용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 동네에는 혐오시설이나 위험시설을 절대 설치하지 못하게 하는 님비현상, 부동산 투기 등은 합성의 오류에 따른 대표적 산물이다. 문제는 합성의 오류에 따른 희생과 비용이 천문학적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게 고스란히 사회 전체에 전가되기 때문에 개인이나 이익집단이 체감으로 느끼는 심각성이 낮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함정이다. 소득 2만 달러 시대에 진입하려면 왜곡된 이중의식부터 수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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