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부인에게 받은 첫 선물이 경제학 원론… 경제와의 첫 시작

[철강신화 지대 - 정치인 박태준]<br>54년 육군대학 수석 졸업… 41세에 포철서 철강인생 시작<br>한국경제 성장 드라이브 주도


고(故) 박태준 명예회장은 포항제철의 신화를 이룩한 '철의 사나이'로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의 철강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이끌었다. 그는 국가 기반을 다진 거물 경제인이자 정치에도 몸담은 4선 국회의원으로 국무총리까지 역임하며 '정치인 박태준'으로의 족적도 뚜렷하게 남겼다. 고인은 1927년 경남 양산 출신이다. 1933년 만 6세의 나이로 모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했다. 1945년 와세다대 공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광복과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했다. 이듬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2학년까지만 학업을 마치고 다시 귀국했다. 1948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6기생을 마친 뒤 한국전쟁 등을 거쳤고 육군대학 5기로 입교해 수석 졸업(1954년)하기도 했다. 부인 장옥자씨를 만난 것도 그 해다. 맞선을 본 지 한 달여 만에 결혼한 그가 부인에게 처음 받은 선물이 경제학 원론 서적이다. 그가 인생에서 경제와 처음 인연을 맺은 순간이다. 군인의 삶을 걷고 있던 박 명예회장은 1961년 5ㆍ16쿠데타 이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같은 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회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 임명돼 경제인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개발독재'와 '산업화'의 양면을 그리는 대한민국의 성장 드라이브를 주도하는 시발점이 이때다. 박 명예회장은 1963년 6월 한국일보에 연재된 이병철의 '우리가 잘 사는 길'을 읽으며 '1인당 국민소득이 76달러에 불과한 가난한 대한민국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외자 도입에 의한 공업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뜻을 같이했다.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박태준은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그는 박정희로부터 대한중석 사장을 맡아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대한중석을 1년 만에 적자에서 흑자로 돌려놓은 박 명예회장은 일본을 오가며 철의 중요성을 느꼈고 종합제철소 건설의 꿈을 키운다. 1968년 4월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영문명 POSCO) 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철강인으로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이후 박 명예회장은 일본 철강업계의 선진기술 도움과 대일 청구권 자금을 받아 포철의 일관제철소 사업을 이끌어 한국 철강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인은 '철강왕'으로 한국 철강산업의 산증인으로 자리매김한다. 박 명예회장은 포항제철 사장으로 재임하며 10년 만에 연 550만톤의 철강을 생산하는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현재 포스코는 세계 최고의 철강기업 중 하나로 성장했고 자동차ㆍ조선으로 이어지는 한국 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포항제철을 경영하며 사원복지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최고 수준의 주택단지를 조성했다. 박 명예회장은 사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을 포함해 초ㆍ중ㆍ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1986년에는 포항공과대학교를 세웠다. 1981년 포철 초대회장에 취임한 그는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정치인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해 제11대 민주정의당 소속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한다. 13ㆍ14ㆍ15대 국회를 거쳐 1990년 민정당 대표에 취임했고 노태우ㆍ김영삼ㆍ김종필의 3당합당으로 창당한 민주자유당(민자당)의 최고위원에 오른다. 그러다가 김영삼 정부 출범 후 당시 김 전 대통령과 갈등을 겪으며 1992년 10월 민자당을 탈당하고 이듬해 포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해외에서 머리를 식히는 도중 포철 세무조사로 본인과 가족ㆍ친인척ㆍ측근들에 대한 전방위 비자금 조사가 시작되며 뇌물수수 혐의까지 받는다. 일본 망명생활을 지낸 박 명예회장은 여야의 영입제의를 거부하고 1997년 포항 북구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컴백한다. 자민련 총재로 영입된 그는 IMF 관리체제의 국가부도 위기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김대중-김종필(DJP) 연합을 통해 탄생한 김대중 정부 시절(2000년) 공동정부의 자민련 몫으로 국무총리에까지 올랐다. 총리에 취임하며 '경제 총리'로 의욕을 불태웠지만 조세 회피 목적의 부동산 투기 문제가 불거지며 불과 4개월 만에 낙마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박 명예회장은 정계복귀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됐지만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며 끝내 현실 정치를 외면했다. 박 명예회장은 지난달 9일 병세가 악화돼 입원해 몇 차례 수술을 받으며 회복되는 듯했으나 이달 초 다시 상황이 나빠져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끝내 13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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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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