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이 6자회담 수석대표에 이어 외교장관까지 잇따라 만나면서 남북관계가 해빙무드에 들어서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으나 아직은 갈 길이 멀어보인다. 천안함ㆍ연평도 문제에 대한 북한의 명확한 사과가 전제되지 않는 한 남북관계 복원은 없다는 게 우리 정부의 명확한 입장인데 북한은 사과는커녕 적반하장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번 회담을 북미대화와 6자회담으로 넘어가기 위한 형식적 통과의례로 삼으려는 북측의 눈치는 우선 해결돼야 할 과제라는 지적이다.
다만 이번 남북 간 비공식 회동은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라는 다자 외교공간에서의 접촉이지만 비핵화를 의제로 한 남북 간 첫 양자회담이라는 점에서 한반도 정세 흐름에서 갖는 무게감이 적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금강산 관광객 총격 사건을 시작으로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 등 잇단 악재로 남북 간 긴장이 가속화돼왔다는 점에서 이번 양자회담으로 경색된 남북관계에도 숨통을 틔워주는 동시에 6자회담 재개 흐름에 활기를 불어주는 중대한 정세 변화의 모멘텀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천안함ㆍ연평도 사과 등 아직 갈 길 멀어=그러나 이번 회담만으로 그동안 꼬여 있던 남북관계 변화와 6자회담 재개가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은 너무 앞서가는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무엇보다 이번 회담을 바라보는 남북 양측의 분석이 엇갈린다는 점이다. 우리 정부는 남북대화와 북미대화의 병행을 원하고 있지만 북한은 다음 단계인 북미대화로 서둘러 넘어가려는 분위기다. 즉 북한이 남북대화를 북미대화로 넘어가기 위한 '통과의례'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새를 보이는 점이다. 실제 청와대를 비롯해 외교안보당국은 매우 신중한 분위기다.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여전히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에 대한 북측의 사과가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남북 간 대화는 천안함ㆍ연평도 사건에 대한 북한의 입장표명이 있어야 가능하다"며 "여기에 면죄부를 준다면 국민이 이해하겠느냐"며 냉소적 반응을 나타냈다. 한편 정부는 올해 8ㆍ15 경축사에서도 대북 관련 메시지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남북관계 모색을 위해 한창 거론되던 통일부 장관 교체설도 다소간 잠잠해진 상태다.
미국 또한 이번 회담에 임하는 북측의 의도에 회의적이다. ARF 참석을 위해 발리를 방문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도 "6자회담 재개를 검토하기 전에 (북한은) 한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더 많은 일들을 해야만 한다"며 북측이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북대화ㆍ6자회담 재개 급물살 타나=다만 이번 ARF에서 남북 외교장관과 6자회담 수석대표의 만남 자체에는 큰 의미가 있다는 평가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무엇보다 남북 외교장관이 3년 만에 만나고 6자회담 수석대표가 2년7개월 만에 다시 얼굴을 맞대고 테이블에 앉았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있다. 여기에다 두 번의 고위급 회담에서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노력에 양측이 협조하자는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박의춘 북한 외무상과의 만남에서 양측은 경색된 남북관계 진전 노력에도 협조하자는 공통된 의견을 주고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게다가 ARF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한 27개국 외교장관들도 남북대화가 지속돼야 한다는 내용의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외교가에서도 경색된 남북대화와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는 게 중론이다.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이번 회담은 남북관계 개선을 진전된 신호로 고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