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 산책] 미술계의 서바이벌 게임


며칠 전 미술관에서 중견작가 A를 만났는데 안색이 밝지 않았다. 그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40살이 지났는데 웬 사춘기?"하고 농담인양 받아넘겼지만 그는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 중이라면서 속내를 드러냈다. A는 이른바 '저평가'된 예술가다. 미술계에서 저평가란 작품성은 뛰어나지만 미술시장에서 인기가 없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A는 작품이 안팔리는 작가로 낙인 찍혔지만 마음이 동요된 적은 없었다. 예술성과 상업성은 일치하지 않으며 경제적인 고통은 훌륭한 예술가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브랜드 작가의 승자독식 심화 그런 그의 신념이 흔들리는 일들이 생겨났다. A의 친구 S가 기록적인 경매가로 언론의 주목을 받고 미술계의 로또복권이 되면서부터다. 두 예술가는 나이와 전시경력도 비슷하고 역량 있는 작가로 평가받는 등 공통점이 많았지만 둘의 처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졌다. A는 개인전을 개최하겠다는 화랑이 없는데다 1년에 몇 점의 작품도 팔기 힘든 반면 S는 화랑들이 전시를 유치하려고 경쟁을 벌이는가 하면 작품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왜 한 사람은 굴욕적인 상황에 처해지고 다른 한 사람은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 것일까. 브랜드가 두 예술가의 운명을 갈랐다. A는 브랜드 가치가 없는 작가, S는 유명 브랜드 작가로. 이런 사례에서도 드러나듯 다양성과 독창성이 중시되는 미술계에도 선택 받은 극소수의 유명 브랜드 작가에게만 부와 명예ㆍ권력이 쏠리는 승자독식이 심화되고 있다. 블루칩 예술가는 기록적인 가격에 작품이 팔리면서 돈방석에 앉지만 브랜드가 없는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극빈층으로 전락한다. 비단 예술가뿐이랴. 컬렉터들도 메이저 화랑을 선호하고 선금을 지불해서라도 무명작가의 작품보다 유명 브랜드 미술품을 구입한다. 경매장에서는 낙찰가격이 예술적 가치를 보증하는 잣대가 됐다. 경제학자인 도널드 톰슨에 따르면 컬렉터들이 브랜드 미술에 열광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브랜드 미술은 슈퍼 부자들의 허영심을 충족시켜준다. 창작품인 미술품은 럭셔리 상품과는 품격이 다르다. 최고의 명품을 소장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부와 고급 취향을 지닌 특권층임을 과시할 수 있다. 게다가 인기 브랜드 작품은 재테크의 수단이 된다. 둘째, 감식안(鑑識眼)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시켜준다. 다시 말해 예술성을 검증할 안목이 없기에 인기 작품을 산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독일의 경제잡지 '캐피털'은 매년 미술가 순위를 발표하는데 브랜드 중독자들은 상위권에 선정된 작가의 작품만 골라 산다. 왜? 타인들의 눈에 미적 안목이 없는 졸부로 비쳐질까 두려워서다. 인기 브랜드 미술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증가할수록 미술계의 폐해도 늘어난다.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인기 브랜드 작품만 유통되면 관람객들은 특정 작품만 감상하게 된다. 그 결과 안목의 결여, 취향의 획일화가 가속화된다. 더 큰 문제점은 미술계의 서바이벌 게임이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무한경쟁으로 내몰고 창작 에너지를 소진시키며 빈부격차를 만든다는 것이다. 소명있는 작가들 많아 희망적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예술작품을 상품으로 보는 세태에 거부감을 갖는 예술가들이 아직은 많다는 사실이다. 경제학자인 한스 애빙은 이렇게 비유한다. "예술의 신화를 굳게 믿는 젊은이들은 마치 금광을 찾아 몰려드는 골드러시를 연상하게 한다. 예술을 향한 그들의 열정은 그토록 뜨겁다." 예술의 길을 천직이나 소명으로 여기는 작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희망적이다. 브랜드 가치는 없지만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 '바위에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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