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규제의 進化

며칠 전 석간신문에서 우리나라 창업환경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라는 기사를 읽다가 오래전에 작성했던 보고서가 생각났다. ‘신규기업 설립절차 비교조사’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워낙 고생이 많기도 했지만 필자의 기억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기업을 설립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절차와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첫번째 보고서라는 점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지난 83년 현재 공장설립과 관련된 모든 법규를 낱낱이 뒤지고 발로 뛰는 실사를 거쳐 만든 이 보고서에 따르면 자본금 50억원의 전자부품 공장 설립을 가정할 경우 모두 13가지의 인허가를 포함해 총 36단계의 절차가 필요하고 구비서류는 종류만도 124종에 총 175부가 요구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각 단계마다 운 좋게 한번도 퇴짜 맞지 않고 일사천리로 진행됐을 경우 무려 346일이 걸리고 추가적인 절차가 요구되는 경우 최대 568일이나 소요되는 것으로 돼 있다. 외국과의 합작기업일 경우에는 절차와 구비서류가 훨씬 많아지고 인허가에 걸리는 기간도 대폭 늘어난다. 미국이나 대만 등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한 것으로 나와 있다. ‘거미줄 같은 규제망을 뚫고 공장을 짓는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참 대단하다’는 게 보고서 작성을 마친 후 받은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술적 절차 보다 정책 규제가 문제 80년대 들어 규제문제에 관심이 높아지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2차 오일쇼크로 위기에 빠진 경제를 살리는 방안으로 규제문제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작은 정부를 표방한 영국 대처의 개혁바람도 한몫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즈음부터 규제개혁은 모든 정부가 내거는 주요정책의 단골메뉴가 됐다. 당연히 정권을 거치면서 수많은 규제개혁 기구들이 생겨났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직속에서 각 부처마다 규제개혁에 경쟁적으로 나서는 분위기가 계속됐다. 참여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규제개혁 기구가 상설로 설치돼 있다. 간혹 규제개혁에 대한 성과도 발표된다. 정확하게 비교해보지는 않았지만 80년대와 비교하면 절차와 구비서류 등이 크게 간소화되고 소요일수도 크게 단축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규제도 진화한다. 그리고 여건과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규제가 없어지기도 하지만 새롭게 생겨나기도 한다. 규제가 단순히 절차와 구비서류, 그리고 소요일수 등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만이 아닌 것도 이 때문이다. 얼마 전 기업설립절차 대행기구에 권한을 대폭 위임한다는 정부 발표도 있었지만 기술적인 절차나 서류 등은 귀찮기는 해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요즘 규제를 둘러싼 논란의 대상은 절차나 규비서류 등의 문제라기보다는 수도권 규제, 재벌규제, 노사 관련 제도 등 같은 정책적인 규제이다. 규제도 진화하고 여건과 시대상황에 따라 규제가 몰고 오는 경제적ㆍ사회적 득실도 달라진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적인 규제는 보는 시각에 따라 타당성과 효과가 다르기 때문에 쉽게 해결이 안된다는 점이다. 가령 수도권 규제의 경우만 해도 기업투자를 가로막는 걸림돌이기 때문에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과 수도권 집중 억제와 지방발전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둘러싼 공방도 사정은 비슷하다. 규제완화 실적이 계속해서 발표돼도 기업이 느끼는 체감규제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투자 가로막는 규제 과감히 풀어야 수도권 규제에 완강한 입장을 보여온 정부가 마침내 몇몇 기업들을 대상으로 공장증설을 허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경제활성화대책 차원에서 검토되고 있다는 것이다. 수도권 집중이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규모 투자가 일어나 일자리가 창출되고 경제회생에 도움이 된다면 주저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수도권 규제가 근거하고 있는 수도권을 누르면 지방이 살아난다는 ‘풍선논리’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질 때가 됐다. 투자의 최대 걸림돌로 지적되는 출자총액 규제도 같은 맥락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기업들이 세계 각지를 대상으로 투자환경을 저울질하는 세계화시대에서는 혼자만의 절대적 기준의 규제완화는 별로 의미가 없다. 경쟁국보다 앞서는 상대적 의미에서 규제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모든 규제를 글로벌스탠더드로 비교 평가하는 것은 그래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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