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포퓰리즘이 국가흥망 가른다] <2> 길잃은 아르헨티나 경제

정권 유지위해 퍼주기식 복지… 겉은 고성장 속으론 곪아터져<br>세계 6위 에너지자원富國 불구 투자 안해 휘발유부족·정전 빈발<br>노조 툭하면 파업… 산업성장 발목, 일자리 끊기고 빈곤층 날로 늘어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정부 발표와 달리 치솟는 물가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번화가에 줄지어 들어선 노점상들이 손님을 맞고 있다. /사진=이학인특파원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요즘 고가의 수입차나 명품가구 같은 내구재 구매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페소화로 은행에 저축을 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바보 취급을 받기 일쑤다. 일반 중산층까지 보유자산을 달러화로 바꾸거나 브라질ㆍ우루과이 등 인근 국가로 재산을 빼돌리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다들 과거 연 5,000%까지 치솟았던 초인플레이션을 경험한 데 따른 일종의 학습효과인 셈이다. 한마디로 정부의 경제정책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데서 나온 국민들 나름의 생존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요즘 외견상으론 고도성장기를 구가하고 있다. 지난해 성장률은 9.2%에 달하며 올해도 6%(IMF)대의 고성장이 예상된다.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 비율도 40.7%로 브라질ㆍ우루과이 등 남미국가는 물론 미국보다도 낮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이러한 고성장을 체감하기 어렵다는 푸념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변덕이 심한 날씨처럼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언제 또 위기를 맞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전문가들은 물론 일반시민들 사이에도 팽배해지고 있다. 자신들의 인구 10배가 넘는 4억명을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양의 곡물과 고기를 생산하는 아르헨티나는 최근 수년간 이어진 글로벌 인플레이션 덕분에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렇게 찾아온 기회를 정권의 인기유지를 위해 퍼주기식 복지정책의 재원으로 소진하고 있다. 특히 오는 10월 대선을 앞두고 모든 정부기관이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현 대통령의 재선에 동원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갈수록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기조 위협하는 인플레이션=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요즘 시시각각 다가오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정부의 공식 발표와 달리 일반 국민들이 체감하는 장바구니 물가는 가히 살인적인 수준이다.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의 물가상승률은 지난 2008년 7.2%, 2009년 7.7%, 지난해 10.9% 수준이다. 그러나 민간기관들이 산정한 인플레이션율은 2007년 18.7%, 2008년 22.2%, 2009년 15%, 2010년 26.4% 등이다. 현 정부가 실시하고 있는 물가정책도 전시행정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봄 아르헨티나 정부는 197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 있었던 국영 슈퍼마켓 체인을 다시 설치한다고 밝혔다. 이 슈퍼마켓은 일반 슈퍼마켓보다 생필품을 훨씬 낮은 가격에 판매하게 된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물가안정을 위해 전국에 설치한 소규모 국영상점인 '코메르시토스'와 비슷한 개념이다. 외국계기업에 다닌다는 게르트 뮐러(32)씨는 "주변에 보면 요즘 들어 벤츠 등 수입차를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인플레이션이 더 확산되면 지금 차를 사는 것이 훌륭한 재테크 수단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이 빈곤상태이거나 빈곤에 처할 위기에 놓여 있지만 정부는 10%에 불과하다고 강변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 통계치가 조작됐다고 비판하는 경제학자를 기소해 벌금을 물리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에너지난에 허덕이는 자원부국=지난달 이후 아르헨티나는 휘발유 부족사태를 겪고 있다. 겨울 휴가철을 맞아 연례적으로 찾아오는 현상이지만 올해는 아르헨티나 최대 정유업체인 YPE에서 파업이 벌어졌던 까닭에 상황이 한층 심각하다.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덜하지만 외곽으로 나가면 휘발유가 바닥나 문을 닫은 주유소를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자원부국이다. 광물자원 잠재보유량은 세계 6위에 달한다. 천연가스ㆍ원유매장량도 상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에너지 수입국이다. 지난 2006년 에너지 부문에서 56억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지만 올해는 순수입 규모가 3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미래 자원개발이나 생산능력 확대를 위한 투자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갈수록 에너지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전기사정도 넉넉하지 않아 산업 현장에서는 툭하면 공장 가동을 중단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아르헨티나는 전력이 부족할 경우 가장 먼저 송전을 중단하는 곳이 산업시설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민심을 의식해 에너지와 운송 분야에 엄청난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어 재정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경제체질 개선은 뒷전=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페르난도(21)씨의 직업은 부자집 개를 산책시키는 '파에소 패로(paseo perro)'다. 그는 10여마리의 개를 하루 3~4시간 산책 시키고 한달에 1,000페소를 번다. 고등학교 졸업 후 3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그는 "직장에 다니고 싶지만 일자리를 구하는 게 무척 어렵다"며 "그나마 이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최근 수년간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실업ㆍ빈곤층 문제 등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2003년 14.5%에 달했던 실업률은 지난해 공식 수치로는 7.3%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여기에 실업자로 분류되지 않는 정부에서 생계보조금을 수령하고 있는 실업가장을 포함할 경우 실업률은 3%포인트 정도 더 치솟는다. 전체 인구 4,050만명 가운데 빈곤층의 비율도 31%에 달한다. 정부의 지나친 규제와 강력한 노조로 제조업 등의 산업이 성장하지 못함에 따라 일자리 공급도 한계에 부딪쳐 있다. 미래를 대비하는 정책도 찾아보기 힘들다. 무역수지 흑자 유지를 위해 수입허가제 확대 등 강력한 수입억제정책만 강조될 뿐 외국인 투자유치 등을 위한 제도개선이나 물류비용 절감을 위한 인프라 투자는 지지부진하다. 아르헨티나에서 삼성전자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은 수도에서 남쪽으로 3,000㎞나 떨어진 티에라델푸에고주에 자리잡고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지역 균형발전을 꾀한다는 목적으로 이곳에만 세금감면을 받을 수 있는 공단 설치를 허가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는 바탕이 허약한 아르헨티아 경제의 회복을 근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지난달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수년간 아르헨티나의 성공을 '위험한 회복(Risky Recovery)'이라고 평가하고 2006년 1월 디폴트를 졸업했지만 경제체질 개선은 등한시한 채 부를 탕진하고 있다며 20년 후 역사는 아르헨티나가 지금의 풍요를 미래를 위한 투자에 사용했느냐고 물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알베르토 라모 골드만삭스 애널리스트는 "아르헨티나 경제가 현재 좋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가 그것이 스테로이드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마치 60m를 전력질주한 후 퍼져버리는 단거리 주자와 같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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