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4월 16일] 완장을 찬 사람

완장은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팔뚝에 두르는 띠다. 완장을 찬 사람은 대부분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다닌다. 학창 시절 교문에서 완장을 찬 규율부장의 모습은 실로 엄격함의 추억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람을 이상한 마력에 빠지게도 해 용기와 자신감을 주기도 하고 교만함의 상징물로 비치기도 한다. 완장의 역사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배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손쉽게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동물의 깃털을 머리나 팔뚝에 꽂고 다니면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종류도 다양하지만 단연코 독일군의 그것과 한국전쟁 당시의 붉은 완장이 인상 깊다. 가장 슬픈 역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에게 채워진 완장이라 할 수 있다. 죽지 않으려고 나치의 만행에 앞장서서 완장을 차보지만 결국 자기도 곧바로 죽게 된다. 윤흥길의 소설 “완장“은 완장으로 평상심을 잃게 되는 인간의 심리적 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완장을 차고 주어진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과 완장을 찬 사람이 권위적이고 거만하게 돌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연구해볼 일이다. 나는 축구장에서 완장을 차고 있는 주장을 좋아한다. 그는 거만하지 않아서 구성원의 마음에 상처도 주지 않고 집단을 조직적으로 강하게 하며 골을 넣기 위해 최대한의 효율성을 제고한다. 이 완장을 찬 주장은 누구보다도 솔선수범하며 열심히 뛰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박지성이 완장을 차고 나오면 국민들은 더 열광한다. 우리는 올해 두 번의 선거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국민의 대표라는 보이지 않는 완장을 차게 해줬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실망감으로 아예 완장 채워주기를 거부한 국민의 숫자도 과반을 넘어섰다. 그 결과 지역주민 전체의 90% 가까이가 자기를 포기했음에도 완장을 차게 된 사람도 생겼다. 뿐만 아니라 국가를 운영해가는 각 분야별 지도급 인사들도 우리 사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완장을 찬 사람들이다. 국민들은 이들 모두가 아우슈비츠의 완장을 찬 사람이 아니라 박지성의 완장을 찬 사람처럼 돼주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국민들이 더욱더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다니며 인도해주는 완장을 찬 사람이라도 돼주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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