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5월12일] 나이팅게일

딸의 고집에 부모의 속이 탔다. 사교댄스 대신 수학을 배우고 귀족 청년의 끈질긴 청혼을 마다한 채 간호사의 길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간호인력을 하녀나 매춘부로 여기던 시절이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5.12~1910.8.14)이 집안의 반대를 뚫는 데 걸린 시간은 10년. 33세가 돼서야 독일의 병원에서 4개월간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런던 개신교 병원의 무급 감독관으로 돌아왔을 때 설마했던 어머니는 격노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연간 1억원 가까운 몰래 돈을 대주며 딸을 돌봤다. 병원도 그녀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모든 걸 뒤바꿨기 때문이다. 종파와 관계없이 환자를 받아들이고 간호사 훈련에서 병원 관리, 보급, 급식에까지 업무 전반을 개선시켰다. 그녀의 무기는 체계적인 기록과 통계. 정확한 통계를 제시하는 그녀의 제안은 그대로 수용될 수밖에 없었다. 크림의 야전병원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 간호사 38명을 이끌고 전쟁터에 도착한 그녀는 환경부터 고쳐나갔다. 통계수치를 곁들이며 개선을 요구하는 그녀에게 군 관계자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보급이 안 될 때는 망치로 창고 열쇠를 부순 적도 있다. 야전병원에 수용된 부상병 사망률은 5개월 만에 42%에서 3%로 떨어졌다. 크림에서의 활동은 그녀를 유명인사로 만들었지만 얻은 것은 과로에 따른 병. 병치레 속에서도 그녀는 병원 통계 표준화와 통계학자들과의 교류에 나섰다. 독자적으로 창안한 도표를 곁들인 통계보고서도 펴냈다. 통계학회 최초의 여성 정회원으로 선출된 후 30년 동안 케임브리지 대학에 통계학과를 신설하려고 노력한 적도 있다. 90세라는 천수를 누린 그녀가 간호사로 활동한 기간은 만 4년. 생애의 대부분을 그녀는 통계를 통한 인간생활의 개선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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