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에는 '허출세'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일제시대 '마름'의 표상이다. 마름은 지주를 대리해 소작권을 관리하는 사람일 뿐이지만 소작인들에겐 지주보다 더 공포의 대상이다. 소설 속 허출세도 소작인들의 등골을 뽑아 먹는 것을 넘어, 겁탈도 서슴지 않을 만큼 횡포를 일삼는다.
그런 마름이 2012년도의 대한민국에도 있을까. 불법이 횡행하는 건설현장을 두고 업계 관계자는 기자에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현재 대한민국의 건설현장의 대형 건설사-하도급업체-재하도급업체의 관계는 일제시대 지주-마름-소작농의 관계와 판에 박은 듯 닮았다. 갑에서 을로, 다시 을에서 병으로 이어지는 권력관계가 그것이다. 갑보다는 을이 병에겐 훨씬 무섭다는 것도 똑같다.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은 '법'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최근 부산의 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재하도급업체 노동자들이 하도급업체가 불법 하도급을 저질렀다며 강남구청에 행정처분을 요청했다. 구청은 해당 업체에게 1억4,0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은 재하도급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하도급을 관리할 의무가 있는 대형 건설사에게 최대 500만원의 과태료를 물리는 행정처분도 서울시에 접수가 됐다. 여기까지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2012년도 대한민국의 건설현장이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현실은 그 이상이다. 건설현장에는 재하도급뿐만 아니라 건설공사를 맡을 수 없는 무면허 업체까지 공사를 하고 있을 만큼 다단계 하도급이 관행처럼 퍼져 있다. 공사는 하나도 하지 않고 중간에서 공사대금만 챙기는 하도급업체도 수두룩하다. 공사대금을 받지 못하는 업체, 임금을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도 비일비재하다.
피해자의 편이어야 할 법은 멀다. 이를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은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사후약방문 식으로 과징금을 요청하는 방법뿐이다. 그마저 체불된 임금 문제가 해결되면 근로자들은 행정처분 요청을 취하해버린다. 그래야 다음에도 하도급을 따낼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할 수 없는 마름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다.
2012년 대한민국 건설현장에 마름은 여전히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