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머니무브 시작됐다] <5> 금융사의 '큰 싸움'

"슈퍼리치 모셔라" 은행·보험·증권사 피말리는 유치 경쟁<br>주식 아닌 '채권형 변액보험' 등 상식 깬 틈새상품 잇달아 출시<br>"상품 R&D 투자 안하면 도태" 새로운 보장성 상품개발 박차<br>금융산업 한단계 도약 이끌수도


돈을 놓고 금융계에 '배틀로얄(큰 싸움)'이 시작되고 있다.

저금리와 과세체계 개편을 촉발된 돈의 대(大)이동이 시작되면서 금융계는 큰 고민에 빠졌다. 슈퍼리치(현금성 자산 10억원 이상)의 자금이동이 눈에 띌 정도로 빨라지면서 "돈의 유출을 막고 새로운 거액자산가를 유치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커졌다. 시중은행의 자금담당 부행장은 "지난 2001년 재개된 금융소득종합과세제도는 돈의 이동을 유발하고 금융시장을 재편하는 계기가 됐는데 이번에는 정도가 훨씬 강하다"며 "싸움에서 질 경우 내상은 한동안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25일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삼성패밀리오피스. 삼성생명이 운영하는 고액자산가 자산관리 전담조직인 이곳에 6명의 고객이 방문했다. 이들은 최소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슈퍼리치'들이다. 각자 한 시간 넘게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UBS 소속의 프라이빗뱅커(PB)에게 자산관리 상담을 받았다. 돈을 어디로 움직일지 판단하기 위함이었다. 상품소개부터 운용전략까지 상세한 설명을 듣고 그들은 자리를 떴다 한다. 시중은행의 한 PB팀장은 "요즘의 상황에서 슈퍼리치들이 방문하면 긴장할 수밖에 없다"면서 "금융사들은 이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다른 PB센터가 내놓지 않는 특화된 상품을 내놓기 위해 밤을 샐 정도"라고 말했다.

◇격화되는 금융사 간 자산가 쟁탈전=머니무브는 금융사 간 큰 싸움을 예고한다. 지금까지는 은행이 덩치나 업력을 앞세워 금융시장을 주도했다면 앞으로는 은행-보험사-증권사 간에 자산가를 붙잡기 위한 각축전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삼성생명이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UBS와 업무협약을 맺고 'S클래스급'의 금융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결국 자산가를 선점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다.

틈새상품을 내놓기도 한다. 미래에셋생명은 24일 '채권형 변액보험'이라는 다소 낯선 상품을 출시했다. 지금까지 변액보험은 '주식'과 짝패를 이룬다는 게 업계의 상식. 당연히 통념을 뒤집은 새로운 시도라는 평가가 나왔다. 미래에셋생명은 앞으로의 재테크 시장이 수익률보다는 리스크 관리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 내다보고 이 상품을 기획했다. 생보업계 관계자는 "미래에셋생명의 시도는 일종의 '길목 지키기'인 셈인데 상식을 파괴해서라도 체질을 개선하고 자금쟁탈전에서 이기겠다는 각오가 깔려 있다"고 해석했다.


◇상품 R&D 투자 없이는 도태=금융산업에서 연구개발(R&D)은 낯설다. 제조업의 전유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금융계도 R&D를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판단한다. 비슷하면 외면 받는 시대가 온 탓에 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탓이다. 실제로 미래에셋생명이 출시한 '채권형 변액보험' 역시 R&D의 성과물이다. 또 큰 인기를 끌었던 유전펀드만 해도 상품을 출시하기까지 1년이라는 연구기간이 소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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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한국투자신탁운용 상품전략팀장은 "앞으로는 단기적인 고수익만을 추구하기보다는 중위험ㆍ중수익에 대한 수요가 많아질 것"이라면서 "고객의 요구에 맞춘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R&D에 더 많은 품을 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금융계가 새로운 유형의 상품개발에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전망되면서 금융산업의 또 다른 도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김용구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금융사 간 경쟁이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연초 개정세법 특수를 잡기 위한 경쟁은 뜨거워도 너무 뜨겁다"며 "과세제도는 단편적인 세법조문 차원을 뛰어넘어 경제전반과 금융산업 발전의 매개체로 작용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2001년의 상황은 선례다. 당시 금융소득종합과세제도가 재개되자 금융시장이 들썩였다. 전체 은행권 수신예금의 50%에 육박하던 1억원 초과 거액예금 중 상당수가 증권시장으로 이동했다. 증시상승의 원동력이 됐고 외환위기(IMF)의 후유증을 앓고 있던 기업들에 훌륭한 자금줄 역할을 했다. 동시에 모든 금융사들은 절세상품 개발에 가속도를 붙이기 시작했고 VIP 마케팅이 줄을 이었다. 국내 금융시장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올해도 상황은 비슷하다.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금액 변경으로 금융계는 퇴직연금ㆍ은퇴상품 등 이른바 보장성 상품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어 보장성 자산시장의 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금융사의 조직 체계도 머니무브에 맞춰 개편될 것으로 업계는 내다본다. 시중은행의 한 전략담당 부행장은 "이제 금융사들에 있어 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의 문제가 돼버렸다"며 "금융상품ㆍ조직ㆍ사업모델 등 모든 것을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해 체질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박해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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