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2월 17일] <1622> 브루노 화형


1600년 2월17일, 로마 캄포디피오리(꽃의 들판) 광장.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지오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가 입에 재갈을 문 채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 죽었다. 향년 52세. 지동설과 무한우주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체포해 화형대에 올리기까지 교회는 타협을 시도했으나 브루노는 끝내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사형이 선고됐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두려움보다 판결문을 읽는 당신들의 두려움이 더 클 것이오.'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브루노는 과학의 진리(지동설)를 탐구하다 종교의 핍박을 받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가운데 유일한 순교자로 남아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종교재판이 열리기 전에 자연사했고 갈릴레이는 법정에서 지동설을 저주한다고 맹세한 끝에 풀려났으나 브루노만큼은 목숨을 버리고 학문적 양심을 지켰다. 나폴리의 가난한 군인 가문에서 1548년 태어난 그는 18세에 도미니크수도회에 들어가 사제교육을 받은 후 제네바ㆍ리옹ㆍ파리ㆍ런던ㆍ프랑크푸르트ㆍ뷔르템베르크ㆍ프라하ㆍ취리히 등을 떠돌며 대학 강단에 섰다. 천문학에서 범신론까지 그의 강의는 인기를 끌었으나 '요주의 인물'이라는 딱지 때문에 끊임없이 옮겨 다녔다. 파도바대 수학교수 자리도 갈릴레이에게 간발의 차이로 밀렸다. 교수직 대신 찾아온 운명은 체포. 투옥에서 화형까지 7년9개월간의 수감생활에 지친 브루노는 밤이면 촛불에 손가락을 댔다 뗐다를 반복하며 삶과 죽음을 고민했다고 전해진다. 학문의 자유를 편협으로 압살한 브루노 화형은 유럽의 학문과 문화ㆍ경제의 주도권이 지중해에서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었다. 억압은 유한해도 자유를 향한 의지의 생명력은 무한하다. 브루노는 자신을 태웠던 로마의 광장에 동상으로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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