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마르크의 소설<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하이라이트는 전쟁터에서 나비를 잡으려던 주인공이 유탄에 맞아 쓰러지는 대목이다. 존ㆍ케빈이 주연한 영화에서는 비극이라기보다 서사시적인 분위기의 장면을 보여주었다. 보는 쪽이야 그럴지 몰라도 유탄을 맞는다는 것은 당하는 쪽에서 보면 '황당한 비극'이다.
바야흐로 정치 계절이다. 무책임한 말의 유탄이 횡행한다. 비판의 자유와 더불어 비방의 자유도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고 하지만 불 안 땐 굴뚝에서도 여기 저기 연기가 난다.
정적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문법은 아직도 창창히 유효하다. 하기야 정치판이 '신사들의 저녁 식사'쯤으로 품격을 올린다면 흥미도 반감하고 지루할 법하다.
분별력 있는 관전 능력이 유권자에게 있다면 선거게임은 제도적인 카타르시스의 기회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한 건의 사건이 터지면 목표물과는 본질적으로 관계가 없는 쪽에 대고 난사(亂射)질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유탄은 나르고 희생자가 나온다.
정치계절은 감성이 지배한다. 이성적 판단을 호소하는 언론조차도 감성에 흐른다. 사법적 진실이 밝혀지기도 전에 검찰청 앞마당은 이미 유죄판결을 '연출'한다.
재판과정은 슬그머니 표적에서 사라지고 매스컴은 그 결과만 대서특필한다. 그리하여 유탄에 맞은 희생자는 법적으로는 혐의를 벗어나지만 완전한 '사회적 복원'을 이룰 수가 없다. 비방으로 씌워진 멍에라도 좀처럼 벗기가 어려운 세태다.
정치판이야 피ㆍ아가 다 유탄에 노출되니 억울할 일도 없을 것 같다. 받아치는 방법도 수단도 장군 멍군 식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놓고 '비방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지 모른다.
문제는 정치판에서만 그랬으면 좋은데 욕하면서 닮는다고 대중사회마저 그 현상에 휩쓸려 있다. 바야흐로 '비방시대'가 도래한 느낌마저 든다.
한국사회를 두고 '감성 체질 못 말려'라고들 말한다.합리와 이성의 사회는 어렵다는 비난이 깔려 있다. 조금씩 성숙사회로 가는 듯 하다가도 선거 때만 되면 흐름이 흩어진다.
소란한 통과의례로 치부해 두면 좋겠지만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으니 문제다. 그렇지 않아도 밀려나고 몰려나는 시류이니 유탄에 맞을 희생자가 적지 않을 듯 싶다. 정치인들이야 업보라고 치더라고 다른쪽에서나마 '황당한 비극'이 억제되었으면 싶다.
손광식(언론인)
document.write(ad_script1); ▲Top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