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둑의 초보자이지만 꽤 즐기는 편이다. 즐기는 것 만큼 실력은 없다. 이기기보다는 지는 쪽이다. 바둑전문 채널을 보면 고수들의 판도 이해가 가는데 실전에 들어가면 안개 속을 더듬다가 어림수를 놓아 일패도지하곤 한다. 워낙 수가 낮은 탓이기도 하겠지만 대마가 곧잘 죽는다. 그래서 「대마불사」란 어느 수준에 이르러야 통하는 얘기라고 믿는다.기아사태가 심각한 국면에 들어갔을 때 당시 부총리 강경식씨는 『이제 대마불사의 시대는 지났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업이 판만 크게 벌리면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한국적 불문율을 뒤엎는 소리였다. 기아자동차 김선홍 회장을 공격하기 위한 발언이었지만 부실의 늪에 빠진 재벌들에게 띄운 메시지로 전파되었다.
진짜로 많은 대마들이 경제위기의 와중에서 죽었다. 그러나 말이 대마지 5대 재벌에 견주어 보면 중마정도였다. 강경식씨의 시대흐름과 판세읽기는 그래서 아마추어 수준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대마는 고수들의 세계에서는 역시 불패의 원리가 살아있다.
이헌재 금감위원장과 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은 5대재벌의 부채축소를 포함한 구조조정이 지리멸렬하자 강경카드를 내 놓았다. 부채비율 200%를 지연시키거나 자산평가익 등 계산방식을 바꾸는 편법을 쓰는 경우 은행장에게 책임을 묻고 내부자거래를 철저히 색출해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물론 대통령의 말씀이 강경조치의 배경이었다. 서슬이 퍼렇기로 치면 진짜 「대마불사론」을 이번에는 엎을 기세이다. 강경식씨야 워낙 권력 누수기에 들고 나왔으니 그렇다치더라도 이번 두 「개혁 기수」는 권력 장악기란 배경을 깔고 있다. 더욱이 구조조정이라는 시대적 압력을 등에 업고 있다. 이런 저런 사정이 얽혀서 진짜로 대마 하나가 무너진다는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시중에 돌기도 한다.
『대마도 죽을 수 있다』는 말의 본질은 시장논리다. 재벌의 존립을 가능케 했던 또 하나의 논리인 정치논리에 영향을 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미묘한 점은 그걸 강행시키는 게 시장이 아니라 정치권력이라는 점이다. 시장원리는 대마가 죽게되면 죽는 것이지만 정치논리는 죽일수도 살릴 수도 있다.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 경제 사회논리로 재벌 하나를 죽이려 했던 것은 실화이다.
DJ는 이 문제를 놓고 지금 5대 재벌과 복잡한 바둑 한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개혁, 구조조정, 실업문제, 거기 더하여 내년엔 돈 드는 총선이 있다. 페어바둑을 두는 李감독원장이 국면 운영을 어떻게 조립해 갈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는 한 때 김우중 전경련 회장과 바둑을 즐겨 두던 인물이다. 孫光植(언론인)